엉개나무(엄나무) 잎이 알맞게 피었으니 와서 따가라는 형님의 전화를 받고 지난 일요일엔 시댁엘 다녀왔다. 설에 다녀왔으니 삼 개월이 채 안 되는 기간인데, 시댁 마을은 그새 또 변해 있었다. 마을로 들어서는 도로를 경계로 앞쪽이 모두 파헤쳐져 공장부지 조성이 거의 끝나고, 건물도 여러 채 들어섰다. 머지않아, 벌겋게 드러난 땅 위로 공장들이 빽빽하게 세워지
졸지에 조카를 떠나보내고 처음 나선 아침 산책길에 딱새를 만났다. 참 말이 많았다. 하고 싶은 말을 참았던 수다쟁이처럼 지저귀는 소리가 소란스럽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도 그다지 경계하지 않는 것 같다. 나는 평소와 다른 친밀감이 들어 녀석에게 말을 걸었다. 되도록 짧고 다정한 목소리로 "아침밥 먹었니? 왜 혼자야?" 마치 딱새의 말을 이해
쇼핑몰에서 젊은 부부가 앞서 가고 있다. 청춘의 아이 아빠는 두 살배기 아기를 어깨 위로 쑥 올려 안은 채 아내와 얘기를 나누며 걸어간다. 앙증맞은 모자를 쓰고 따뜻하게 옷을 입은 아기는 아빠의 어깨에 가슴을 대고 뒤에 따라오는 풍경을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구경하고 있다. 아기를 향해 손을 흔들며 웃으니 아기도 방긋방긋 답을 해준다. 지금 아기에겐 아빠의 어
햇볕이 따뜻하다. 볕을 끌어안고 창을 보고 누웠다. 집이 남향이라 따뜻한 볕이 하루 종일 집안에 머문다. 평일에는 집에 있어 본 적이 없고, 주말까지도 대부분 바쁘다 보니 햇살을 받으며 누워 있을 시간은 좀처럼 없다. 편안함에 눈을 감았다. 조금 있으니 볕이 얼굴을 살살 만지는 듯하다. 눈을 떴다. 높이 달린 빨래 건조대가 눈에 들어온다. 너무 높이 달려
막 벙글고 있는 목련꽃 아래 서서 보얀 속살을 밀어내려 팔락거리는 목련 송이와 눈을 맞추고 있다. 회색 솜털 껍질을 벗어내려는 목련송이들의 긴장과 설렘이 손에 잡힐 듯하다. 다행히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고 햇살은 눈부시다. 겨우내 북쪽을 바라보고 있던 목련송이들이 목적지에 거의 다다른 것처럼 한껏 부풀고 있다. 들여다보고 있는 사이 알뜰한 비밀을 풀
책꽂이에 꽂혀있는 오래된 책을 꺼내 뒤적거리다보니 속표지에 '위로, 비전을 바라보며 위를 향하여' 라는 글자가 보인다. 이게 무슨 글인가. 하도 오래전 일이라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마음을 다잡기 위해 어느 책에선가 가져온 글귀 같았다. 그 책은 영어 참고서이고, 들추어보니 수험생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아마 그 흔적 때문에 여러 차례의 이사에도
산행을 하다가 야생화를 보았다. 높은 산에는 아직도 잔설이 분분한데 어느새 꽃을 피웠다. 추위에 강하다는 얼레지다. 다소곳이 밀어 올린 자주색 꽃잎이 안쓰러우면서도 더없이 곱다. 한 대에 여러 송이를 피우는 여느 꽃과 달리 한 대궁에 한 송이만 피웠다. 바람에 흔들거리는 모습이 마치 피겨선수가 한쪽 발로 회전하는 모양을 닮았다. 언 땅을 뚫고 올라온 모습이
멸치가 달려왔다. 불경기의 찬바람 속으로 몸을 틀어 향했다. 가난해져 휑해진 것 같은 세상에 멸치들이 헤적여 닿았다. 중년 여인 네댓이 우르르 들어와 자리를 잡고 앉는다. 일터에서 일을 하다 점심식사를 하러 온 직장동료들 같다. 벽에 붙어있는 메뉴들은 보지도 않고 국수를 주문한다. 메뉴판엔 국수, 이천 원이라고 쓰여 있다. 그 중 가장 싼 가격의 메뉴다.
이른 아침 혼자서 카페에 들어섰다. 밖에는 다문다문 겨울비가 가볍게 내린다. 향긋한 커피향이 그만이다. 커피는 언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서 좋다. 오늘도 손님은 나 혼자다. 처음 얼마 동안은 혼자서 커피를 마시는 것이 조금 낯설기도 했다. 허나 이제는 출근 전에 가끔씩 내게 주는 하루의 선물이다. 달콤한 카페라테에 휘핑크림을 곁들이고 나면 커피향의 달콤함
모자 하면 생텍쥐페리의 모자가 먼저 떠오르지만, 그보다 더 친숙하게 다가와 빙그레 웃게 하는 모자가 있다. 찰리 채플린의 모자, 그의 슬랩스틱 코미디가 그리운 것이 아니고 그의 모자가 그리운 것이다. 그 모자에서 비둘기가 나오고 장미꽃이 나오고 하얀 토끼가 나오던 어린 시절의 마술사 모자. 학교 강당에서 황홀하게 바라보았던 그 검정색 모자가 그리운 것이다.
송은숙 시인
이월은 가슴이 설레고 조심스럽다. 세상의 기운이 터질듯 차올라 아롱거리며 새부리처럼 도처에 돋아 있기 때문이다. 화사한 햇빛이라도 쏟아지면 삼월이 오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일시에 탄성을 지를 듯이 누리에 팽팽하다. 가득해야지만 포만감을 느낄 수 있다고 할지라도 이월은 텅 비어 있는 것에서 시작된 충만감을 맛보는 달이다. 출산을 앞둔 만삭의 여인 같은 달이다.
겨울비가 내리고 있다. 오늘은 고향 가는 길이다. 아니 아버지의 유택으로 가는 길이다. 고향 길 접어들면 언제나 갯바람이 먼저 반긴다. 매번 오는 고향길인데도 중년이 넘어서면서부터 그 길이 사뭇 다르고 자꾸만 간격의 틈이 생긴다. 바쁘게 움직여야만 하는 현실에서 잠시나마 고향으로의 회유는 성찰이나 휴식의 기회이기도 하다. 평범하게 살고 있는데도 일상에 팽팽
나는 오늘도 강이 보이는 신호등 앞에 차를 세우고, 정면에 서 있는 세 그루 메타세쿼이아를 바라본다. 자를 대고 그린 듯 반듯한 삼각 모양 나무는 때로는 차창 너머로 마그리트의 그림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도 하고, 때로는 누군가 압화를 완성시켜 허공에 걸어둔 것 같은 느낌이 들게도 한다. 오늘도 나는 이 나무 뒤에 있는 강을 떠올리며 푸른 하늘과 잘 지
뜻밖의 비밀을 알게 되거나 감추고 싶은 일이 드러났을 때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고 한다. 판도라가 호기심에 못 이겨 금지된 상자를 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자를 열자 상자 속에 들어있던 질병, 시기, 죽음과 같은 온갖 재앙이 쏟아져 나와 세상으로 퍼져나갔다. 이처럼 신화나 전래동화 등에서 일을 그르치는 가장 큰 원인은 호기심이다. 푸쉬케가 호기심으
해마다 그랬듯이 올 연초에도 내 인생의 발전을 위해 소박하면서도 근사한 계획을 세웠다. '부지런해지기'였다. 천성이 게으른 내가 해마다 가지는 간절한 바람과 계획이 '부지런해지기'다. 일손이 느린 데다 소심해서 일에 진척이 없는 편이다.혼자서는 나름대로 애를 쓰는 데도 주위 사람들에 비해 안쓰러울 정도로 성과가 없다. 우연히 점집에서 점을 봤는데 내
산등이 어둑한 외양간에 엎드린 소등처럼 보이는 초저녁이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전통 주술품인 드림캐처가 춤을 추며 현관에 들어섰다. 거미집 모양의 성긴 그물에 구슬 장식과 새의 깃털을 층이 지게 묶어 모빌처럼 장식하고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인디언 특유의 몸짓이 느껴지고 그들의 생활을 눈앞에서 보는 듯하다.고종시누이 부부가 스무닷새 동안 알래스카 여
어쩌다 보니 여태 김장을 못했다. 김치는 남들 곱절을 먹으면서, 입에 맞는 김치에 꽂히면 속이 아릴만큼 먹어대면서 태평스레 손 놓고 있다. 아파트 음식 쓰레기통에 가득한 김장찌꺼기를 보면 김장해야 하는데, 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빈방에 켜지는 엘이디 전구처럼 번쩍인다.이렇게 말하면 모르는 사람은 김장 그거 당장이라도 시작하면 될 거 아니냐고 하겠지만 나는
동아리 모임이 끝나고 밖으로 나오니 벌써 저녁이었다. 하늘엔 노을이 타는 듯 붉었다. "와, 정말 곱다. 꽃밭 같네요." 탄성이 절로 나왔다. 옆에 있던 선배가 한마디 했다. "너는 저 노을을 보고 꽃을 떠올린단 말이냐? 나는 각혈하는 여공들의 붉은 뺨이 떠오른다." 그러면서 대상을 감상적으로 바라보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달빛 흐린 상현달과 별이 몇 하늘에 떠 있고, 민박 뒤쪽 컴컴한 동산에서 늦은 가을인데도 반딧불이들이 반짝거리며 날아올 것 같은 축축한 밤이다. 마당 한 쪽에서 시작되는 바다는 비린내도 너울도 없이 타작마당처럼 펼쳐져있다. 몇 몇 낚시꾼들이 마당에서 웅성웅성하더니 사라지고 어색해하는 여행객들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바다를 보고 있다. 무언가 일어날 것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