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12월 중순이다. 한 매체에서 올 겨울은 따뜻할 것이란 예보가 있었다. 그 예보에 뭘 기대했던 건지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은 겨울이 겨울답게 추운 것이 오히려 좋다. 아침나절 거실을 어슬렁거리다 한 장 남은 달력에 또 눈길이 닿았다. 올해 따라 이 마지막 한 장이 유난히 을씨년스럽게 보인다. 살림살이가 다른 해보다 유독 살아내기 벅찼던 한 해라 그런가 싶다. 밖으로는 지속되는 코로나 19와 국내외 심각한 경제 불안과 우크라이나 전쟁 등 어느 하나 녹록한 것이 없었던 한해였다. 안으로는 식구들 건강과 진로가 기대만큼 편하지 않았
나는 어려서 새를 무척 좋아했다. 새는 하늘을 높이 날아 달이나 별에도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늘을 마음껏 날며 무한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존재가 새라고 여겼다. 그것이 내가 새를 좋아하는 이유였다. 그 환상은 새를 잡아다 키우고 관심을 가지고부터 조금씩 깨어졌다새나 사람이나 어미가 되면 자식을 키우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다. 어미 새는 일 년 중 사 분의 삼을 고생해서 새끼를 키운다. 가을이 되면 새끼를 키워 떠나보내고 봄이 오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또다시 새끼를 키우는 일을 반복한다. 그것이 모든 생명체가 가진
내 안에는 나도 모르는 내가 숨어 산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는 놈이어서 더러 곤혹스러울 때도 있다. 어제가 그런 날이었다.반듯한 성품으로 여러 문우의 모범이 되는 선배님의 차를 얻어 탔다. 자주 어울릴 기회가 없었던 분이라 이물 없는 자리는 아니었다. 그런 자리에 끼면 말주변이 없는 나는 대화가 궁해진다. 가만있으면 중간은 가는데 그걸 못 참고 한소리 거들다 보면 아차! 하는 순간 놈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만다. 화제에 오른 인물은 나와 가까운 사이였다. 요 근래에 의견이 맞지 않아 관계가 소원해진 친구였다. 마음이 꼬여있던
하반기에 진행되는 울문아 2차 답사는 10월의 초입, 본격적인 가을로 접어든 길목이었다. 더군다나 1박을 하는 일정이었으므로 여행 겸 답사를 할 수 있는 기회라 내심 기다림과 설렘이 컸다.평소에 유적지를 탐방하며 역사적 지식과 민족의 얼을 되새기고 오늘이 있기까지의 삶을 조명하는 울문아의 학습 철학과 이념정신이 내 가슴에 파고들었다.몇 년 전 직장연수 때 서해안 일대를 탐방했는데 이번 코스에 중복되는 곳도 있었지만 기억을 되살려 다시 할 수 있는 기회라 내심 반가웠다,수덕사, 해미읍성, 삼존마애석불 등은 굳이 양국장님이 배부해 주신
익숙해진다는 것은 무엇일까? 낯설지 않은, 몸과 마음이 평온하게 대상을 대할 수 있을 때 '익숙하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젊은 시절을 다 지나올 때까지 내겐 도저히 수긍할 수 없고 익숙해지지 않은 것이 몇 있었다. 그 중 물이 달고 공기가 달다는 것이 있다. 청년기까지 고향에 부모님이 계셨다. 그때 집 안에 우물이 있었는데, 물맛이 좋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래서인지 어른들이 집에 오시면 우물에서 길어온 물 한 사발을 먼저 대접했다. 특히 한여름에 오시는 손님은 대청에 오르기도 전에 물부터 찾았다. 우리는 우물로
바람이 맑아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공원으로 향했다. 산책로 입구에 들어서자 지난해 솔숲 사이에 피었던 청보라 빛 산수국이 떠올랐다. 기대를 안고 수국이 심어진 곳으로 갔지만, 꽃은 아직 피지 않았고, 수국을 에워싼 잡초가 먼저 눈에 띄었다. 수국이 무리 지어 자라는 곳도 있었지만 심은 지 오래지 않아서인지 기세 좋은 잡초에 치여 겨우 두서너 잎만 고개를 내민 것도 많았다. 쑥, 쇠무릎, 자리공 등 잡초의 강한 생명력에 수국이 기를 펴지 못하고 있었다. 걸음을 멈추고 어린 수국 주변의 잡초를 뽑기 시작했다. 잡초도 들꽃이라고 누군가
"제가 남창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인천공항 여행객 미팅에서 미모의 여자 인솔자에게 내가 불쑥 뱉은 말이다. 주변의 초면인 동행자들은 박장대소다. '초저녁부터 젊은 여자가 남창을 찾다니!'라며 이상한 눈으로 보는 것만 같다. 그러나 주변의 분위기와는 상관없이 그녀는 나의 손을 덥석 잡으면서 "나도 남창이 고향입니다. 부모님은 아직 그곳에 살고 계십니다. 참 좋은 곳이죠"라고 반갑단다. 그녀는 전국에서 모인 서른 명의 해외여행객의 인솔자다. 인솔자만이 가진 동행자 명부를 보다가 "남창에 사시는 분이 누구시죠?"라고
네모진 바다가 찰랑거린다. 철판 가마에는 섯을 통과한 바닷물이 가득하다. 가마쟁이는 불이 골고루 잘 지펴지도록 땔감을 엇갈리게 놓는다. 불이 약한 안쪽으론 소깝을 빙글빙글 돌리며 던져 넣고 바깥쪽엔 쪼갠 통나무를 대어 불길을 살린다. 염포 소금포 역사관에서 울산 자염 만드는 과정을 보고 있는 중이다. 소금을 얻기 위하여 바닷물을 모아두는 웅덩이를 염정이라 하고, 그 여과 장치를 섯 또는 서치라 한다. 섯은 진흙을 바른 웅덩이 바닥에 둥근 나무를 깔고 대나무로 덮는다. 그 위에 밀짚을 엮어 여러 겹 깔면 완성된다. "울산 소금은 이래
아이 갖기를 기피는 세상이다. 아들이 늦은 나이에 결혼했는데도 출산에 대한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다. 우리 세대는 결혼하면 출산은 당연한 걸로 여겼었다. 요즘 세대는 경제적인 이유로 니, 결혼해도 출산하지 않고 맞벌이로 사는 이니 하는 말들을 많이 해 섣불리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결혼 한 것만도 감지덕지 처분만 기다리고 있었다. 한데 며느리가 결혼하자마자 허니문 베이비를 가졌다고 했다. 놀랍고도 고마웠다. 결혼한 것만도 과분한데 손주까지, 이건 겹경사가 아닌가. 출산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경사가 이어졌다.
아이들이 초등학생이었을 때 이웃 절친이 교회 여름성경학교에 아이들을 보내자고 했다. 마침 방학이어서 안성맞춤이었다. 좋은 취지라 여기고 기꺼이 입교를 시켰다. 아이들도 적응을 잘했다. 무엇보다 집 앞에 교회차가 와서 데리고 가고 마치고는 또 데려다주니 안전하고 신경 쓸 일이 없었다. 장난감 만들기, 그리기, 영상 시청 등, 다양한 학습 프로그램과 갖가지 체험은 아이들을 학습에 관한 흥미를 갖게 하는 데 한 몫을 했다. 더군다나 맛있는 점심에 간식까지 챙겨주어서 집에 올 때는 옥수수, 빵, 음료를 한 보따리 챙겨 와서 엄마한테 내놓으
얼마 전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 완역본을 읽었다. 두 권으로 축약한 책은 읽은 적이 있는데 완역본은 처음이다. 무려 5권, 2,500여 쪽에 이르는 엄청난 분량이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레 미제라블』 하면, 증오에서 자비로, 불신에서 사랑으로 바뀌게 되는 장발장의 파란만장한 이야기 정도로만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이 방대한 소설엔 19세기 프랑스의 역동적인 사회상이 버무려져 있다. 뜻밖에도 장발장은 처음부터 등장하지 않는다. 미리엘 주교에 대한 이야기가 무려 100쪽 가까이 이어진 다음, 2편에서야 모습을 드러낸
정원 아래에 이웃의 고사리 농장이 있다. 일반적인 농작물과는 달리 이른 봄에 새순을 거두고, 지각한 순들은 남아서 녹색의 여름 들판을 만든다. 고사리가 텃밭머리 쪽 빈터로 넘어오기 시작한 것은 삼 년 전부터다. 처음에는 눈치채지 못한 채 늙어버린 몇 포기를 보고서 그들의 이동이 시작된 것을 알았다. 이듬해는 실하게 열 포기 정도 올라와 산초잎과 달래를 함께 넣고 된장찌개를 끓였다. 성찬의 고명이 되어 봄날 향기로운 저녁 식사의 추억을 선물해 주었다. 뜻하지 않게 상수리나무 아래 한 평 정도의 고사리밭을 갖게 된 나는 경사지에 돌계단
폐지가 생기면 내다 놓지 않고 모아두는 남편이 답답했다. 왜 굳이 비좁은 다용도실에 따로 두느냐는 타박에 꼭 필요한 분에게 드릴 것이라고 말했다. 밖에 내놓으면 필요한 사람들이 가져갈 터인데 공연히 일을 만든다며 짜증을 내도 별 반응이 없었다. 어쩌다 폐지가 사라지고 나면 내 속이 다 후련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휴일 낮이었다. 등 굽은 할머니가 얼기설기 나일론 끈으로 짐칸을 만든 작은 손수레를 끌고 집 앞에 멈추었다. 쓰레기통 옆에 누군가 세워둔 빈 종이상자를 집어 수레에 담고는 걸음을 옮겼다. 힘들게 수레를 끄는 등 굽은
비 오는 날 초등학생인 손녀를 내 승용차로 등교시켰다. 매일 혼자 걸어서 다니는 학교지만 비 오는 날이라 귀여운 손녀가 고생할까 걱정이 돼서였다. "할아버지 차비는 나중에 커서 갚을게요"하며 손을 흔들고는 교문을 종종걸음으로 들어갔다. '차비를 받으려면 오래 살아야 할 텐데'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던 것을….육십여 년 전, 내가 초등학교 다닐 적 비가 오는 날이 생각났다. 집에서 학교까지 십 리 길을 아무 불평 없이 걸어 다녔다. 그랬던 것은 더 멀고 더 험한 길을 걸어서 학교에 오는 친구도 많아서 불평은 사치였다.
포켓몬 빵 열기는 아직 가시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누그러질 유행임을 누구나 알고 있지만 빵 구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한정판 명품을 구하기 위해 백화점이 문 여는 시간을 기다렸다 매장을 향해 질주하는 '오픈런'을 방불케 한다. 유튜버들은 발 빠르게 빵과 함께 들어있는 띠부씰(떼어다 붙였다 하는 스티커)을 보여주는 영상을 찍어 올려 유행에 화력을 더했다. MZ 세대 어른들은 추억을 소환하기 위해, 아이들은 빵을 구하고 스티커 모으는 경험을 친구들과 공유하기 위해 마트나 편의점을 찾는다. 시간을 다투는 싸움이다. 아이들
이 문장은 수백, 수천 번의 메질로 태어났다. 대장간의 호미, 낫, 쇠스랑을 본다. 날 선 농기구들의 어깨가 단단하다. 제 이름을 얻기까지 저것들은 얼마나 혹독하게 자신을 단련해야 했을까. 눈부신 절차탁마 앞에 서면 마음이 숙연해진다. 광석을 녹여 쇠를 뽑아내거나 가공하는 모든 작업을 쇠부리라 한다. 원광석을 숯과 함께 용광로에 넣어 하루 정도 불을 때면 천삼백 도 이상의 고열에 녹아내려 쇠똥과 분리된 쇳물이 나온다. 이 선철을 단야하면 농기구가 되고 조리도구로도 탈바꿈한다. 다섯 평 남짓 허름한 대장간엔 여러 가지 도구들로 가득
전남 광양, 망덕포구에 자리한 '윤동주 시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을 다녀왔다. 지인을 따라나섰던 건 민족시인 윤동주를 있게 한 정병욱의 본가라 하기에 관심이 쏠려서다. 이 세상에 윤동주 시詩를 알린 사람, 그런 인물이라면 입소문이라도 났을 법한데 내 귀가 어두웠던 걸까. 어디에서도 윤동주 시에 얽힌 내력을 들어본 적이 없다.정병욱 가옥이 문화재로 등록된 것은 2007년도라고 한다. 중요한 역사의 한 토막이 반세기가 넘도록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는 게 의아했다. 한국인이라면 윤동주의 시 한 소절쯤은 알고 있을 법한데
과거 정가의 한 인사가 그 가족과 함께 부도덕하다며 동네북이 된 일이 있었다. 그때와 매우 유사한 건임에도 최근 정치권 일부에서 보인 상반된 태도에 옹호하는 치들도 더러 있지만 후안무치 그 자체란 날카로운 평 또한 세간에 회자되고 있다. 학교에서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는 필자는 함께 오르내리는 "내로남불" 사자성어의 짜임이 우리 한글에 영어와 한자어가 조합된 묘한 구성에 어원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여기저기 자료를 살폈다. 그러다 표준국어대사전엔 없는 이 신조어를 유튜브에 넣었더니 "반크한류학당"이 만든 한 동영상에서 이게 무슨 말인가
싱그러운 오월이다. 금아 피천득 선생님의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 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 이 구절이 절절이 들어맞는 계절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계절에 '효도의 달' '감사의 달'이란 이름을 누군가 슬며시 얹어놓았다. 무거워지는 감사의 달. 속으로만 품었던 감사의 마음을 살며시 꺼내보기도 하고 조심스레 마음을 건네 보기도 하는 달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모처럼 꺼낸 마음이 움츠러들게 하는 감사에 대한 빚이 내게는 여럿 있다. 학교졸업 후 고향으로 내려와 20
오랫동안 변두리에 살았다. 우리 동네는 원래 군이었다가 내가 태어날 때쯤 시에 편입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시의 변두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셈이다.변두리란 어느 지역의 외곽지대를 말한다. 가장자리이고, 변방이며, 주변지역, 경계지역이다. 변두리, 하면 흔히 허름함, 무언가 떠밀린 삶, 가파른 언덕과 골목집을 떠올리기 쉽다. 실제 내가 방학 때 머물던 서울 이모네도 변두리에 있었는데, 겨울이면 연탄재를 뿌렸던 골목과 시내의 불빛이 아득히 보이던 언덕 꼭대기, 종점으로 향하는 기차가 지나가는 굴다리가 기억난다. 하지만 변두리도 도시 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