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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주군 범서읍 입암마을의 감나무 고목은 마을 한 가운데 쯤에 자리잡고 있다. 가장 높은 곳이어서 마을 곳곳이 한 눈에 들어온다. 수령 150~200년으로 키가 12m에 달하는 이 고목은 감나무로는 드물게 마을 당산목으로 고혹적 자태를 품고 있다. 유은경기자 usyek@ulsanpress.net

봄날이 성큼 성큼 익어갈 때면 감꽃이 떨어질 생각에 가슴이 몹시도 설레던 기억이 새롭다. 이른 아침 까치발을 하며 감나무 아래로 살금살금 다가가 마당에 후둑후둑 떨어져 뒹구는 새하얀 감꽃을 주워 실에 꿰어 목걸이를 만들던 기억이 새롭기만 하다. 바둑이는 큰소리로 멍멍 짖어대고, 마음 졸이며 감꽃을 주웠던 생각이 어제 일처럼 또렷이 떠오른다. 유난히도 먹을 것도 가지고 놀 것도 없었던 배고팠던 시절에 아이들에게 감꽃은 유일한 군식거리였다. 큰 놀잇감이기도 했다. 감꽃은 그 해에 자란 감나무의 녹색 가지에 핀다. 잎 사이에서 네 장으로 된 노란 꽃잎은 끝이 밖으로 말린다. 수정이 끝나면 꽃 전체가 떨어져 내린다. 그 꽃을 주워 실에 꿰면 꽃목걸이가 된다. 큰 것은 손가락에 끼울 만하다. 초여름의 감꽃은 어린이들의 꽃반지가 되어 유년의 추억으로 남는다. 아! 아! 감나무는 그 모진 세월을 견디게 한 겨레의 나무였다. 어느 것인들 세월과 함께 사라지지 않는 게 있으랴. 추억도 한갓 사치에 불과한 것이라고들 하지 않는가. 이제는 다 지나간 일이다.



우리의 옛 마을에는 한때 감나무가 지천으로 자라고 있었다. 조상들이 기자목(祈子木)이면서도 7덕(德)과 5절(節)을 갖춘 나무라면서 마을을 열면서 감나무를 많이 심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개발바람에 밀려 곱게 곰삭은 마을이 사라지면서 감나무 또한 무수히 베어져 나갔다. 이제 감나무는 마을을 상징하던 나무로서보다는 과일로서 재배되고 있다. 감나무 고목(古木)을 만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 됐다. 울산에도 감나무 고목은 다섯 손가락을 헤일 정도에 불과하다.

 감나무는 우리 나라 중부 이남지방에서 자라는 키 작은 낙엽성 나무다. 원산지는 중국과 우리 나라, 일본이다. 중국에서는 기원 전 2세기경에 재배했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은 많은 품종을 육성했다. 재래종 외에도 8세기경 중국에서 전래된 품종을 개량하여 800여 종의 품종을 내놓았으며, 특히 단감은 일본 특유의 품종이다.

   감은 크게 단감과 떫은감으로 나뉜다. 재래종은 떫은감으로 대봉시와 고종시, 반시, 사곡시, 분시, 월하시, 원시 등이 있다. 주로 일본 수입종인 단감은 부유시(富有枾)와 차랑시(次郞枾), 선사환(禪寺丸) 등이 있다. 감나무는 6m에서 15m까지 자라고, 겉껍질은 회갈색으로 비늘 모양으로 갈라지고 어린 가지에는
갈색털이 있다.

예전 지천에 널렸던 과실목 개발바람에 베어져 나가

 

 

   
▲ 하늘을 찌를듯 뻗어나간 가지 끝에 걸린 겨울 하늘이 청명하기만 하다.

   잎은 어긋나고 가죽처럼 질기며 길이가 7-17㎝, 너비 5~10㎝의 타원형 모양으로 가장자리는 밋밋하다. 5-6월에 잎겨드랑이에 조그만 꽃병처럼 생긴 노란색을 띤 흰꽃이 핀다. 수꽃에는 16개의 수술이 있다. 암꽃의 암술은 길이 15-18㎜로 길게 갈라지고 씨방은 8실(室)이다. 열매는 10월에 꽃이 진 자리에 공 모양의 주황색 또는 붉은색으로 익는다. 감나무는 약용으로도 가구재로도 쓰였다. 감나무의 성숙한 꽃받침을 시체라고 하며, 딸꾹질과 구토를 멈추게 하는 효능이 있고, 야뇨증 치료제로도 썼다.

 감은 중풍예방과 불면증 치료와 신경안정제로 쓰였다. 모세혈관을 튼튼하게 하고, 항암효과가 뛰어나고, 노화방지 효과도 있다. 위장을 튼튼하게 하며 소화력을 돕고 위궤양에도 좋다. 감잎은 비타민 C가 많고 고혈압에도 좋다. 감잎차를 많이 마시는 이유다. 감나무 목재는 재질이 굳고 무늬가 좋아 가구재로 쓰인다. 탄력이 있어 골프채를 만드는 데에도 썼다. 덜 익은 열매는 천연염료로 쓰였다.

 예부터 100년 되는 감나무는 1,000개의 많은 감이 열린다고 해 기자목(祈子木)으로 불리었다. 더욱이 일곱 가지 덕(德)을 가진 나무로 예찬을 받았다. 첫째 오래 살고(一壽), 둘째 그늘이 짙으며(二多蔭), 셋째 새가 둥지를 틀지 않고(三無鳥巢), 넷째 벌레가 생기지 않으며(四無蟲), 다섯째 단풍이 아름답고(五霜葉可玩), 여섯째 열매가 먹음직스러우며(六佳實可啖), 일곱째 잎이 큼직해 훌륭한 거름이 되고, 글씨를 쓸 수 있다는(七落葉肥大 可以臨書) 것이다. 하지만 요즘의 감나무는 새 집과 벌레가 있다.

 다섯 가지 절(節)을 갖췄다. 감나무 잎은 넓어 글씨 연습을 하기에 좋으므로 문(文)이 있다. 나무가 단단해 화살촉 재료가 되기 때문에 무(武)가 있다. 열매의 겉과 속이 똑같이 붉어서 표리부동하지 않으므로 충(忠)이 있다. 치아가 없는 노인도 홍시를 먹을 수 있어서 효(孝)가 있다. 서리가 내리는 늦가을까지 열매가 가지에 달려 있으므로 절(節)이 있다고 했다. 문무충효절(文武忠孝節)의 5절을 갖춘 나무라는 예찬을 받았다. 조상들이 즐겨 심지 않을 수가 있었으랴. 요즘에는 도심의 가로수로도 널리 심어지고 있다. 감의 고장 청도의 가로수길과 보령의 가로수길이 유명하다.

 '호랑이와 곶감' 이야기가 전한다. 호랑이가 배가 고파 먹을 것을 찾아 마을로 내려왔다. 어머니가 우는 아기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어머니가 "울타리 밑에 호랑이가 숨어 있다가 우는 애를 잡아가려고 한다"고 해도 아기는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어머니가 "여기 곶감이 있다"고 하면서 아기에게 쥐어주자 울음을 뚝 그쳤다. 호랑이는 곶감이란 놈이 얼마나 무서운지 겁이 나 오줌을 싸면서 줄행랑을 쳤다고 한다.

울산에는 감나무 고목이 세 곳에 있다. 범서읍 입암리와 언양읍 반천리, 삼동면 조일리 보삼마을이 그 곳이다. 언양 반천리 반천초등학교에 있는 나무는 200~250년생으로 알려져 있다. 울산생명의숲이 2009년 11월 초에 발견한 보삼마을의 감나무 고목은 수고 14m, 뿌리부분 둘레 3.09m, 수관폭 16m, 수령은 200~250년으로 추정된다. 범서 입암리의 감나무 고목은 그들보다는 나이는 적지만 특이하게도 마을 당산나무이다. 감나무가 당산나무인 경우는 드물다.

언양 반천·삼동 조일리 고목 더불어 손꼽히는 노거수

 입암마을의 감나무 고목은 마을의 한 가운데 쯤에 자리잡고 있다. 가장 높은 곳이어서 마을 곳곳이 한 눈에 들어온다. 마을회관 옆에 나있는 길을 따라 남쪽으로 200m 쯤 올라가면 길가 오른쪽에 동향한 동사당(洞祠堂)을 만난다. 사당에 붙어 당산나무 감나무와 그에 버금가는 감나무 고목 두 그루와 새끼 감나무가 함께 어울려 있다.

 울주군이 세운 노거수 안내판에는 '고유번호 2000-66-1. 지정일자 2000년 10월. 수령 150~200년. 수고(키) 12m. 나무둘레 3m. 관리자 입암마을. 소재지 범서읍 입암리 672-6번지'로 돼 있다. 울산생명의숲은 '추정수령 150~200년. 수고(키) 9.8m. 수관폭 20m. 가슴높이 둘레 1.84m, 1.10m, 0.91m, 1.20m. 뿌리부분 둘레 3.12m. 용도 당산나무'로 밝히고 있다.

 당산나무 감나무는 사당 옆 북서쪽 모서리에 있다. 몸통이 50㎝ 쯤에서 네 가닥의 큰 줄기로 나뉘었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뻗었다. 네 가닥으로 나뉜 가운데는 묘하게도 평평하다. 동쪽 것이 가장 굵다. 10도 가량 휘었다가 1m 쯤에서 작은 줄기 한 개는 직립하고, 한 개는 동쪽으로 뻗었다. 그리고는 70㎝ 쯤에서 세 개로 나뉘었다. 네 개의 큰 줄기 가운데 가장 작은 서쪽 것은 50도 쯤 굽어 치솟다가 60㎝ 쯤에서 다시 두 개의 작은 줄기로 나뉜 뒤 완전 평평해졌다가 꺾여 20여m 가량 떨어진 뒤편 작은 대밭에까지 뻗쳤다.

 북쪽의 큰 줄기는 곧게 올랐다가 1.5m 쯤에서 두 개의 작은 줄기로 나뉜 뒤에 여러 개의 가지를 내놓았다. 남쪽의 큰 줄기는 10도 가량 굽은 뒤 1.7m 가량 치솟는 바람에 줄기가 당집 북서쪽 모서리에 닿는 바람에 당집 모서리를 잘라내게 하고는 남북으로 크게 휘어 기형으로 치솟았다. 당산나무 감나무는 그 이름에 걸맞게 사방으로 줄기와 가지를 무수히 내뻗어 너무나 당당한 모습이다.

 

 

 

 

   
▲ 감나무는 문무충효절(文武忠孝節)의 5절을 갖춘 나무라 예찬 받았다. 사방으로 뻗친 고목의 가지에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당집 옆 남쪽의 고목 감나무는 한 나무인데, 마치 두 나무가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직경은 1.7m 가량 돼 보인다. 1.2m 높이에서 작은 틈이 나있다. 그리고는 몸통이 동서 두 방향으로 나눠졌다. 동쪽으로 뻗은 큰 줄기는 세 개로 나뉘었다. 하나는 또 다시 동쪽으로 조금 휘어 뻗었고, 다른 것은 남쪽으로 15도 가량 굽은 뒤에 치솟았다. 나머지는 곧게 뻗은 뒤에 남쪽으로 완전히 굽어 올랐다. 서쪽으로 뻗은 큰 줄기는 두 개로 나뉘었는데, 굵은 것은 직립한 뒤에 1m 쯤에서 여러 개의 가지가 작은 줄기를 내놓았다. 그리고 작은 것은 북서방향으로 80도 가량 휘어져 뻗었다.

200여년 마을 희노애락 함께 한 당산목 '위풍당당'

 당집 앞 동남쪽에 있는 고목 감나무는 고목 가운데 가장 작다. 직경 1m 가량. 1.7m 높이에서 세 개의 큰 줄기로 나뉘었다. 서쪽과 직립, 남동쪽. 서쪽 것은 60㎝ 쯤에서 다시 세 개로 갈라졌다. 직립한 것은 다시 두 개로, 남동쪽 것은 30도 가량 굽은 뒤에 두 개로 나뉘었다. 당산나무를 포함한 이들 세 그루의 고목 감나무 외에도 당집 바로 뒤쪽과 바로 남쪽에 붙어 감나무가 자라고 있다. 그 감나무도 고목만은 못해도 꽤 나이를 먹은 듯 청태가 잔뜩 끼어 있다.

 당집 주변의 감나무 외에도 주변 밭둑에도 감나무가 많이 있는 것으로 미뤄 오래 전에는 울창한 감나무밭이 있었음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더욱이 지금도 마을 초입에는 수백평의 감나무밭이 있고, 또 곳곳의 밭둑에는 오래된 감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는 것으로 봐서 한때 마을에는 감나무가 무성했을 것이다. 가을이면 빠알갛게 익은 감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황홀경에 빠뜨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감나무만큼 우리 겨레와 애환을 같이 한 나무도 드물다. 민요 '감꽃'에서 그 모진 세월을 견뎌온 우리 겨레의 삶을 훤히 엿볼 수 있다.
 <감꽃 모진 꽃아 오막살이 삼대째 토박이꽃/ 갑오년 상투 튼 우리 할배 죽창 세워 낫 갈아 고개 넘어/ 영영 못 오실 길 떠나가신 것을 감꽃 모진 꽃아 너는 보았겠지/ 모진 세월에 우리 아배 식은 밥 말아 묵고 싸리나뭇길/ 지리산 줄기 따라 가신 것을 감꽃 모진 꽃아 너는 보았겠지/ 그래 감꽃아 보았겠지 애비 잃고 땅도 빼앗긴 이 내 설움도/ 울 아배 못 잊어서 불끈 쥔 두 주먹도/ 감꽃 모진 꽃아 오막살이 삼대째 토박이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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