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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륜대좌불과 마여여래좌상. 원형대좌 3단위에 올려진 불상은 머리를 잃어버린채 천년의 시간을 건너왔다. 저물어가는 겨울햇살에 마애여래좌상의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경주 남산은 신라의 진산이다. 남산 자락 나정에서 신라는 시작됐고, 남산 자락 포석정에서 신라는 그 끝을 맞았다. 신라의 처음과 끝이 남산과 함께였다. 그 심연의 시간 속에서 신라인들은 바위를 만져 부처를 깨웠고 탑을 세웠다.

 일연은 그런 남산을 '절들은 하늘의 별처럼 늘어서 있고 탑들은 기러기처럼 줄지어 있다'라고 삼국유사에 적었다. 법흥왕 14년(527)이 불교를 공인한 지 백년도 안 된 진흥왕 때의 일이다. 불교는 신라인들의 염원이고 바람이었다. 현재까지 147곳의 절터와 96개의 탑이 확인됐다. 그래서 남산은 신라의 보물이고 신라의 역사다.
 
 
#매월당을 만나다

500m남짓의 올망졸망한 남산의 산세 속에서 가장 깊은 골이 용장골이다. 용장골로 가는 길은 한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매월당 김시습이다. 불행으로 점철된 한 시대를 살다간 선비였고 승려였고 학자였다.

 그는 명민했다. 신동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3세 때 맷돌에 보리 가는 것을 보고 '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누른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無雨雷聲何處動 黃雲片片四方分)'라는 시를 읊어 세종에게 불려가 총애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명민함이 불행의 시초였는지도 몰랐다. 
  그의 삶은 불우했다. 13살에 어머니가 죽고, 외갓집에 맡겨졌으나 어머니 삼년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외할머니마저 여의었다. 20세에 결혼했으나 1년이 안되어 끝이 났다.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에 통분하여 책을 태웠다. 책은 더 이상 그에게 세상의 정의와 이상을 심어주지 못했다. 스스로 설잠이라 칭하고 전국을 떠돌았다. 21세였고 머리를 깎았다. 피 끓는 청춘이었고 곧은 학문의 길은 타협을 원치 않았다. 동서남북으로 거치지 않은 길이 없었다. 북으로 안시향령, 동으로 금강산, 남으로 다도해까지 9년간을 떠돌았다.

   
▲ 김시습이 7년여를 주석한 용장골 계곡을 가로지르는 곳에 놓인 설잠교. 김시습의 법명을 따서 지난 2004년에 세워졌다.

 1463년(세조 9) 효령대군의 부름을 받고, 잠시 세조의 불경언해 교정을 보았으나 1465년(세조 11) 다시 남산에 금오산실을 짓고 입산했다. 그는 이곳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었고, 《산거백영(山居百詠)》(1468)을 썼다. 학문적으로 사상적으로 한층 성숙된 시기였다.
 1481년에 환속해 새 아내를 맞았으나 1년을 못 채우고 죽고 말았다. 불행한 인연이었다. 다시 방랑길에 나섰다. 세상을 떠돈 그의 삶은 충남 부여 무량사에서 57세로 생을 마감했다.

 때로 한 사람의 궁벽한 일생이 역사와 겹쳐지기도 한다. 돌아보면 그의 삶은 비루했다. 젊어 뜻을 품었으나 꿈은 무너졌고, 그는 떠돌았다. 그러나 시간을 아주 버리지는 않았다. 그 긴 시간, 때론 끓고 때론 고요한 생각들을 책으로 엮었다. 그는 끝까지 절개를 지켰고, 유·불 합일의 사상과 탁월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했다. 1782년(정조6) 이조판서에 추종됐고 영월 육신사에 배향됐다.
 그 곧은 절개는 이제 용장골 시누대처럼 남아 여전히 푸르다.

#머리와 손발을 잃어버린채

용장골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불상은 절골 약사여래좌상이다. 용장계곡의 왼쪽에 머리와 손발을 잃어버린 채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모진 풍상에도 흐트러짐이 없는 강건한 모습이다.
 높이 124㎝, 무릎 너비 140㎝의 건장함이 돋보인다. 일제강점기 때 조사에 의하면 3단의 방형 대좌 중 상·하대석만이 남아 있었고, 중대석은 뒤쪽에 묻혀 있던 것을 파내 복원시켜 놓았다.
 중대석의 각 면에는 정교하게 사천왕상을 새겼다.

 주변에 몇 단의 돌 축대로 보아 당시에는 꽤 큰 가람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은 잡풀과 축대만 남았다. 이 불상대좌 앞에서 3.2cm 금동여래좌상이 발견돼 국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절골에서 나와 계곡을 따라 계속 오르면 현수교 형식의 다리를 만난다. 설잠교다.
 설잠은 김시습의 법명으로 금오산과의 인연으로 남겨진 이름이다. 설잠교를 지나면 시누대 숲이 나타나고 그 한 켠에 폐허로 변한 신라인의 꿈이 나타난다. 용장사터다. 절이 정확하게 언제 생겼고, 언제 사라졌는지조차 알 수 없다. 다만 선명한 것은 축대뿐이다. 그 위에 어느듯 사람의 묘가 누웠다.

   
▲ 흘러내리는 옷자락이 사실적으로 조각된 마애여래좌상. 사람의 눈높이에 맞춘 크기로 마주보고 서면 온화한 눈빛이 절로 사람을 잡아끈다.


 용장사에 대한 가장 확실한 기록은 삼국유사다. '경덕왕(742-765) 시절 유가종의 시조인 대덕 대현이 남산 용장사에 머물렀다. 절에는 돌로 된 미륵불의 장륙상(丈六像)이 있었는데, 대현이 주위를 돌면 장륙상도 대현을 따라 얼굴을 돌렸다'.
 추정의 역사고 정확하지 않지만 대현의 활동시기와 맞물리면 대략 8세기 중엽이다. 설잠의 기록으로 미뤄 조선말기까지가 용장사의 시간이었던 셈이지만 폐찰의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대현을 따라 돌았다는 미륵불

용장사터를 지나 가파른 바위를 오르면 문득 불상이 나타난다. 대현을 따라 얼굴을 돌렸다는 장륙상이다.
 그리 넓지 않은 절벽의 한 끝이다. 아래로 용장사터가 보이는 마당 한가운데 서있다. 커다랗고 투박한 자연석 기단위에 3층 대좌를 올렸다. 아래 두 대좌는 장식이 없는 원반형이고 맨 위 대좌에만 연꽃무늬를 새겨 놓았다. 전체 높이는 4.56m, 불상 높이는 1.41m의 보물 제187호 석조여래좌상이다.

 올려다 본 불상은 머리를 잃어버렸다. 그러나 눈이 부시게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앉은 부처의 모습에 절로 자애로운 눈빛이 연상된다. 사실적인 옷의 조각솜씨가 자연스럽고 맵시 있는 세밀한 처리 등이 돋보인다.

 절벽 안쪽 암면에 마애여래좌상(보물 제913호)이 있다. 어깨가 당당하고, 무릎이 넓어 안정감이 있다. 150cm 내외의 크기로 사람의 눈높이와 맞춘 섬세하고 유려한 솜씨가 남산 제일인 듯하다. 양식과 기법으로 8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광 좌측면에 3줄로 된 10여 자의 명문이 있지만 해독하기 어렵다. 저물어가는 겨울 햇살에 존엄하면서도 인자한 인상이 잘 드러난다.
 
#천년을 건너온 남산 제일의 탑


마애여래좌상을 돌아 나와 로프를 잡고 비탈진 바위를 오르면 별안간 삼층석탑이 모습을 드러낸다.
 산이 바위와 어울려 만들어 낸 절묘한 절벽위에 세워진 용장사지 삼층석탑(보물 제186호)이다. 탑은 기형적인 듯 기단부가 불안해 보인다. 신라 탑의 정형은 상대석과 하대석, 두 기단부를 가진다. 그러나 이 삼층석탑은 얼핏 보면 상대석만 보인다. 눈 밝은 사람이라야 남산 전체를 하대석으로 삼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높이 400여m의 암반을 하대석으로 삼은 신라의 제일 높은 탑인 셈이다.

   
▲ 삼륜대좌불의 앞모습. 예전 대현스님이 주위를 돌면 따라 돌았다는 얘기가 삼국유사에 전한다.


 이러한 신라사람들의 지혜에 앞으로는 고위산을 마주보고 멀리 내남들을 굽어보며 선 석탑의 늠름한 자세에 절로 감탄이 나온다. 이처럼 산을 기단으로 삼은 양식은 비파골 삼층석탑과 늠비봉 오층석탑에서도 보인다. 탑이 산이고 산이 바로 탑이다.
 탑은 담백하다. 단조로운 선들이 모여 탑을 이룬다. 단단한 돌이 만든 부드러운 선 아래로 산아래 풍경이 아스라하다. 기단은 네 모서리와 중앙에 기둥조각을 새기고 2장의 판돌로 덮어 마감했다. 1층 몸돌은 상당히 높은 편이고 2층부터는 급격히 줄였다. 처마는 직선을 이루다가 귀에서 경쾌하게 들렸다. 상륜부는 없어져 원래의 상태를 알 수 없고 찰주를 꽂았던 구멍만 남아 있다.

 탑은 위태했었다. 쓰러져 있던 것을 1922년에 재건했다. 2층 몸돌에 사리함이 도난당했다는 소리도 들렸다. 탑은  꼭대기가 사라진 채로 앞으로 천년을 건너갈 것이다. 석탑 마당 끝에 서면 무두불 마애여래좌상이 내려다보인다. 그 아래로 용장사 터가 고요하다.  글·사진=김정규 kjk@ulsanpres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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