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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의 6개 석빙고 중 가장 오래된 보물 323호 청도 석빙고. 지붕이 허물어지고 홍예만 남았지만 선조들의 시간의 지혜를 느낄 수 있다.

바람은 차고 아직 봄은 멀다. 아침 기온은 아직 영하에 머물러 강물은 살얼음을 깔고 있다.
 청도가 품은 강은 두 개다. 엄밀히 말하자면 아직 강의 형태를 잡기 전이다. 청도천과 동창천이 합쳐져 밀양강을 만들고 낙동강으로 흘러 바다에 몸을 푼다.
 그 강이 만든 윤택한 들에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삶을 열었다. 가장 오래된 흔적은 천이나 구릉이 품은 고인돌이다. 거대한 바윗돌을 덮고 누운 사람들은 벌써 먼지나 흙으로 스몄다. 인공적이지만 인공적이지 않아 사람의 흔적을 찾기 힘들다. 남아있는 확연한 사람의 손길은 청도 읍성과 석빙고다.
 
#옛 사람들의 지혜 청도 석빙고

청도천이 만든 너른 들에 터전을 잡은 사람들은 풍족했다. 그 풍족함에 사람들은 자연을 이용해 겨울 아닌 겨울을 즐기기도 했다. 여유와 지혜의 산물인 석빙고다. 청도천의 얼음을 옮겨 저장했다가 봄부터 가을까지 사용했다. 청도 석빙고는 신라 지증왕 6년 진사 박상고가 만들었다. 천년의 시간을 흘러 온 셈이다.
 당초 청도읍성 북문밖에 있던 것이 허물어져 현재 위치로 옮겼다. 전국 6개의 석빙고 중 가장 오래됐고 경주 반월성 석빙고 다음으로 크다.

 땅을 파 빙실을 만들고 천장에는 아치형으로 석재를 끼워 넣어 지붕을 만들었다. 그 위에 판석을 씌우고 흙을 덮어 외기를 차단했다. 현재 지붕에 홍예 4개만 뼈대처럼 남았다. 빙실의 크기는 길이 14.75m, 너비 5m, 높이 4.4m로 동서로 긴 직사각형이다. 바닥이 경사져 녹은 물이 밖으로 빠져나가게 했다. 바닥은 흙을 단단히 다진 후 편편한 돌을 깔고, 벽은 크고 작은 돌들을 끼우는 방식으로 촘촘히 쌓아올렸다. 천장에 환기 구멍을 설치했던 것으로 여겨지나 확인 할 길이 없다. 언제 허물어져 제역할을 상실했는지 알 수 없지만 드러난 화강석재에 시간의 흔적이 검게 남았다. 안에 들어가 하늘을 올려다보면 아늑하다. 겨울인데도 냉기를 느낄 수 없다. 

 입구에 신축 당시의 비가 서있으나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낡았다. 다만 예전의 기록들을 통해 조선 숙종 때인 1713년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새로 옮긴 것이 4백년의 시간을 건너온 셈이다. 1963년 보물 제323호로 지정됐다.

   
▲ 최근 복원한 청도읍성. 사각형으로 순환하는 남고북저의 석성으로 둘레가 2㎞ 남짓이다.

 
#옛것과 새것의 조화 청도읍성


화양은 오래토록 청도의 중심이었다. 그 중심에 청도읍성이 있다.
 너른 구릉지에 네모형태로 축성된 남고북저의 석성이다. 높이 1.5~2m, 둘레가 약 2,000m에 달하는 규모로 1590년 군수 김은휘가 흙과 돌로 된 성을 개축했으나 몇 년뒤 임진왜란을 견디지 못했다. 동, 서, 북쪽에 성문이 있었으나 소실되고 성벽은 허물어졌다. 한때 성벽과 문루의 재건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다시 성벽이 헐리고 문루도 제거됐다. 침략자에 의해 두 번씩이나 허물어진 운명을 안았다.
 청도읍성은 양반들만의 성이 아니었다. 지방관아와 민가가 한 울타리 안에서 살았다. 그 안에서 행정과 사법이 함께 이루어졌다.

 남은 성벽을 보면 견고하게 지어진 성이다. 쉽게 무너질 성질이 아니다. 그러나 허물어졌고 그 위로 도로가 났다. 목숨을 건진 것은 동헌과 객사, 그리고 향교가 전부다.
 청도군은 남은 읍성의 흔적을 찾아 복원에 한창이다. 무너진 성벽을 다시 세우고 잃어버린 돌들은 새것으로 끼우며 성의 윤곽을 잡았다. 오래된 것과 새것의 색은 확연히 구분된다. 북쪽 문루도 복원해 최근 형태를 갖췄다. 성은 이렇게 완성된 하나의 풍경으로 나아가지만 상처는 여전하다. 서쪽과 남쪽의 돌들은 흩어지고 사라져 기약할 수 없는 풍경을 보여준다.

 성벽에 올라서면 너른 들이 펼쳐진다. 들판은 아직 비어있다. 다가올 고단한 노동의 시간을 담담하게 기다린다. 멀리 청도천이 유유하다.
 동쪽 성벽아래 관리들의 선정비가 모여 있다. 본래 읍성 외각 서상, 동천, 남성현 도로변에 세워 졌던 것들을 모았다. 1675년부터 1904년까지 조선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관찰사 2기, 군수 25기, 찰방 3기로 30기가 도열했다.
 
#88칸짜리 대저택 운강고택

청도천이 화양을 만들고 읍성을 남겼다면 동창천은 고택들을 남겼다. 고택들은 과거를 딛고 서서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금천면 신지리에는 오래된 고택들이 예닐곱채 남아있다. 가장 오래된 집은 1809년대에 지어졌고, 모두가 1800년대 후반에 상량했다. 그 중 2채는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됐다. 운강고택과 만화정이다. 시간을 딛고 오늘에 선 견고한 유산이다.

 금천면 신지리는 조선 중기 성리학자 소요당 박하담(1479~1560)이 무오사화 뒤 벼슬을 버리고 들어와 터를 잡은 밀양 박씨 집성촌이다. 후손들이 운강고택을 비롯해 운암고택, 섬암고택, 도일고택, 명중고택과 선암서원, 만화정 등 세웠다. 오래된 돌담길이 이어지고 그 너머에 더 오래된 기와집들이 있다.
 운강고택은 소요당이 만든 서당 터에 후손 운강 박정주가 분가하면서 살림집으로 지었다. 이후 두세번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1809년에 지었으니 200년이 넘었다.

 규모도 크다. 1770평의 대지에 88칸짜리로 안채, 사랑채, 중사랑채, 행랑채, 등 9개의 건물에 각자 널찍한 후원을 가졌다. 독립된 구조의 안채와 사랑채가 쌍口자형을 이루고 있는 상류 가옥이다. 화장실도 3곳을 두어 신분에 따라 사용토록 했다. 남자용인 측간, 부녀자들이 쓰던 뒷간, 하인들이 쓰던 통시로 구분했다. 특히 아녀자들의 동선을 고려한 곳간과 방앗간, 부엌의 배치가 효율적으로 이루어져 돋보인다. 안채 뒤뜰엔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일곱개의 바위가 이색적이다.
 
   
▲ 88칸 대저택으로 9칸의 건물과 정원을 가진 운강고택. 새하얀 눈이 마당에 소복하다.


#동창천을 내려다보는 만화정

만화정은 박시묵이 1856년께 운강고택을 중수하면서 함께 건립한 정자다. 뒤로는 소나무와 대나무가 울창하고, 앞으론 거대한 느티나무와 버드나무들을 거느렸다. 동창천이 한문에 내려다보이는 강변 절벽위에 뿌리를 내렸다.
 마루를 중심으로 서쪽에 방 1칸, 동쪽에 2칸의 통방을 배치했다. 누마루에는 3면에 헌함을 돌려 바닥을 확장해 공간 구성을 최대화했다. 처마를 길게 연장하고 네 모퉁이에 활주를 세웠다. 누마루 들보 옆의 여의주를 문 용머리 장식과 꽃무늬 장식이 화려하고 만화정기, 중수기 등 무수히 걸린 묵객들의 편액들이 눈길을 끈다. 

 만화정은 애국심을 한 곳에 모은 곳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때 왜적들은 동래읍성을 함락시키고 10여일 만에 청도읍성까지 올라왔다. 당시 박씨 가문의 친인척 14명이 만화정 앞 숲에 모여 결사항전할 것을 결의했다. 이들은  1,0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어성산 등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150년된 백일홍의 선암서원


선암서원은 소요당 박하담과 유학자 삼족당 김대유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다. 원래 매전면 쪽에 있던 사당을 1577년 이곳으로 옮기고 선암서원이라 불렀다. 현 건물은 고종 때 중건했다. 소요당, 안채, 득월정, 장판각 등이 있다. 장판각에 는 도난의 수난을 당했던 보물 '배자예부운락판목'등이 있기도 했으나 지금은 안동 한국학진흥원에서 보관하고 있다. 소요당 앞엔 150년된 백일홍나무 두 그루가 있어, 여름부터 석달 열흘동안 꽃그늘을 선사한다. 글·사진=김정규기자kjk@ulsanpres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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