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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X가 개통된 지난해 말부터 100일 동안 울산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기차문화라는 새로운 문화코드가 울산시민들의 여행패턴을 바꿔놓았다. 기차 없는 도시도 아니고 기차여행을 처음하는 도시도 아닌 울산에 생뚱맞게 무슨 기차문화라는 말을 내놓는 거냐고 핀잔을 할지 모를 일이지만 적어도 대한민국 철도의 중심에서 열외였던 울산이 그 중심으로 편입됐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기차의 속도감은 시간의 단축만이 아니라 업무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가족이나 친지의 거리감도 이어주고 있다. 직장이나 학교 때문에 서울 등지로 떠나 있던 가족들이 금요일 오후 울산으로 돌아와 월요일 아침 첫 기차로 출근하거나 등교하는 풍경도 쉽게 만날 수 있게 됐다.  


 기차는 단순한 이동의 수단을 넘어 새로운 문화를 만드는 특별한 문명의 도구다. 근대화의 상징이 증기기관차의 기적소리였다면 기차가 닿는 곳은 새로운 문화가 탄생하는 창조와 생성의 공간이 됐다. 그 생성의 코드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영화다. 많은 영화 속의 안타까운 이별이나 반가운 재회,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 극적인 순간들이 기차역에서 명장면으로 변용되고 그 장면의 궤적을 따라 이방의 사람들이 기차역 주변을 맴돈다.
 아주 오래전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열연한 영화 '비포 선라이즈'는 단연 기차와 기차역을 소재로 한 최고의 영화라 할 수 있다. 소르본느 대학생인 셀린느가 부다페스트역을 떠나 파리로 돌아가는 길, 미국인 청년 제시와 우연한 만남을 가능하게 한 것은 기차만이 가진 왁자한 소란 때문이었다. 실연의 상처를 안고 비엔나로 향하던 제시와 짧은 만남을 아쉬워하던 셀린느의 운명은 비엔나역에서 갈린다. 꿈꾸는 소년 제시의 서툰 사랑이 비엔나역과 그 주변 풍경과 어울려 해가 뜰 무렵까지 셀린느의 감성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끌림과 절제의 묘한 긴장이 철도 레일처럼 평행선을 그을 동안 영화에 집중한 관객은 정해진 레일처럼 다가온 이별의 순간에 가슴 한켠을 쓸어내리는 찰나, 기차는 멈춘다.


 어디 이 뿐인가. 어린시절의 모든 것이 질퍽한 고향 땅과 영화에 눈을 뜨게 한 영사기사 알프레도 아저씨에게 작별을 고하던 '시네마 천국'의 토토도, 사위를 짓누르는 우울함이 자신을 죄어오면 언제나 기차역으로 달려가 탈출을 꿈꾸던 '디아워스'의 여류시인 버지니아 울프도, 불후의 명작 '카사블랑카'의 릭과 일자도 모두 기차역에서 사랑을 만나고 이별을 보내야 했다. 바로 그 영화의 무대가 철도역이다. 유럽의 고속철도나 일반 철도의 역사는 도심과 함께 호흡한다. 비엔나의 깊고 오래된 역사와 문화가 속도와 효율성이 날렵한 옷을 입은 철도와 만나 묘한 조화를 이룬다. 비엔나만이 아니다. 뮌헨이나 부다페스트, 함부르크와 취리히가 그렇다. 도시의 철도역은 터미널로 구성돼 여행자와 시민들의 일상 속으로 연결돼 있다.

 기차역은 여행자들이 가장 먼저 만나는 도시의 관문이다. 여행을 하다보면 가장 많이 이용하는 곳이 기차역이고 또 많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게 된다. 기차역에는 여행안내소와 열차안내소, 은행, 환전소, 화장실, 매점, 샤워시설, 락커, 레스토랑 등 배낭여행자들을 위한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어 늦은 시간이나 이른 시간에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굳이 유럽을 이야기 하지 않아도 된다. 서울이나 부산, 그리고 대전이나 대구도 철도는 도심과 함께 호흡한다. 일본의 신칸센 역시 도심의 숨결이 스며드는 곳에 역사가 있다. 많은 도시들이 철도역을 도심에 두는 것은 관광산업의 유치 때문이다. 이름난 도시의 대부분은 관광객들이 찾아 볼만한 명소들이 기차역을 중심으로 반경 2km 이내에 있고 기차역에는 짐 보관소나 코인라커가 있어서 무거운 짐을 남겨 두고 가벼운 차림으로 시내를 돌아 본 후 다음 행선지로 이동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울산역은 이제 100일된 철도역이다. 처음부터 유럽의 기차역을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도심과 호흡을 같이 할 수 있는 입지도 아니고 편의시설이나 여행문화 인프라가 구비되지도 않았다. 그냥 지나치려는 고속철도를 시민들의 열의로 서게 했고, 뒤늦게 역사도 만들었기에 엉성한 면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과거의 일이다. 그 때 제대로 했어야 했다는 식의 이야기는 푸념에 불과하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다행히 울산역의 발전 가능성은 충분하다. 울산 선사문화의 중심과 불과 5분거리에 역사가 위치했고 영남알프스와 언양문화권이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다. 지금부터 제대로 만들어가는 일만 남았다. 훗날, 울산역을 무대로 비포 선라이즈나 시네마천국이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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