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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대암각화가 위치한 대곡천 하류는 평원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갈대군락이 넓게 퍼져 있다. 암각화를 만나러 가는 길에 그 평원 앞에 서면 바다를 바라볼 때 느낄 수 없는 묘한 끌림을 경험하게 된다. 바로 오래전, 멀고 먼 시간의 흐름이 멎었다 굽이치다 잠겼던 흔적과 그 틈새를 비집고 나오는 이야기다. 경관이 좋고 매혹적이어서가 아니라 어디선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이야기들이 갈대바람을 타고 오만가지 언어로 귀를 간지럽힌다. 그 묘한 기운을 가슴 한켠에 담고 암각화와 만나면 누구나 문화애호가가 되고 문화유산의 수호자가 된다.

 며칠전 국무총리 일행이 바로 그곳을 찾았다. 지난해부터 이어지고 있는 고위인사들의 계속된 반구대암각화 방문은 늘 반가운 소식이다. 그들이 반갑다기 보다 그들과 함께 따라다니는 언론의 관심과 그로인한 반구대암각화 홍보효과를 반긴다는 이야기다. 아주 오래전 반구대암각화의 보존을 두고 지금 박물관장으로 있는 분과 이런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있다. 논쟁이나 입장차, 방법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바로 여론이 아닐까한다는 것이 그분의 의견이었다.

 올해로 반구대암각화는 발견 40주년을 맞았다. 40년전 크리스마스는 특별했다. 흰눈 사이로 썰매를 타고 산타가 축복의 선물꾸러미를 놓고가듯 대곡천 끝자락에 암각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7,000년을 버텨온 암각화지만 아무도 그 가치를 몰랐으니 그간의 세월은 물 속이든 물 밖이든 의미가 없었다. 발견자의 회고담은 소설같다. 촌로들의 이야기를 쫓아 벽면을 더듬자 고래가 쏟아졌다. 무늬만 고래가 아니라 살아 숨쉬고 작살에 꽂혀 신음소리가 이끼를 비집고 나오는 생생한 현장이 암면 위에 꿈틀거렸다고 한다.

 그런 이야기가 나온지 벌써 40년이다. 지난해 9월 프랑스에서 있었던 일이다. 추문과 돌출발언으로 유명세의 중심에 있는 사르코지 대통령이 프랑스 서남부 몽티냐크 마을에 위치한 라스코 동굴을 방문했다. 발견 70주년을 기념한 이날 방문은 두고두고 구설수를 피하지 못했다. 사르코지가 그런 구설을 예견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이미 20년전 미테랑 당시 프랑스 대통령도 라스코 동굴 발견 50주년을 기념해 여론의 포화를 무시한채 실물 동굴을 관람했다. 최고지도자들이 자신의 나라에 있는 세계문화유산의 실물을 직접 보는 것이 여론의 도마에 오르는 나라가 프랑스다. 그들의 두피나 각질, 거친 호흡이 쏟아내는 무수한 종균이 1만8,000년 전의 문화유산을 훼손한다는 것이 비난의 이유였다.

 라스코 동굴벽화는 프랑스 아키텐 주의 베제르 계곡 몽티냐크 마을에서 발견된 선사유적지다. 지난 197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곳은 세계 문화유산으로서 엄청난 가치가 있지만 관람객의 방문이 벽화를 훼손시킬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1963년부터 일반 공개가 금지됐다. 프랑스 정부는 인근에 실물을 똑같이 재현한 복제 동굴을 만들어 일반에 공개해 왔다. 사르코지의 방문에 맞춰 야당과 문화계 인사 등은 "대통령이라고 특권을 누려서는 안 된다. 동굴 개방금지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돼야 한다"고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사르코지는 "나는 라스코 동굴에 들어가는 특별한 혜택을 받았으며 1만8,000년 전 인간이 그렇게 감정을 표현한 걸 보고 깊은 감동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래도 목소리가 가라앉지 않자 "나는 문화와 예술가의 보호자다. 현 정부는 10년에 40억 유로로 제한됐던 문화유산 복원을 위한 예산 한도를 과감히 철폐했다"고 더 큰 소리를 질렀다.

 들소와 말, 사슴, 염소 등 100여 마리의 육상동물들이 등장하는 사냥 장면을 그린 벽화는 사진으로만 봐도 입이 벌어진다. 문화가 밥이라는 의식을 가진 프랑스인들이 그들의 국가수반이 토해내는 입김조차 거부하는 문화유산은 그림이 아니라 인류의 기원과 삶의 방식이다. 바로 그와 유사하지만 전혀 다른 해상동물을 바위에 새긴 흔적이 반구대암각화다. 그것도 짧은 기록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덧칠한 기록이 바로 울산 반구대에 남아 있다. 햇살과 바람, 심지어 장대같은 장맛비와 태풍에도 벌거벗긴 채 우리와 만나고 있다.

 벌써 국무총리만 두 번, 국회의장과 주무 장관, 국회의원들까지 숱한 인사들이 반구대암각화와 만나 이야기 했다. 갈대평원에 거친 세속의 때를 씻고 암면에 서면 한결같이 '보존'을 외친다. 문제는 떠난 뒤의 일이다. 고래 울음 소리가 멀어지면 다시 불붙는 이해관계는 좀처럼 간극을 좁히지 못하는게 현실이다. 문제는 그곳에 있는 인류의 흔적인데 7,000년 후의 사람들이 마실 물과 보존의 경계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팽팽한 긴장의 끈이 어느 쪽으로 기울지는 모를 일이지만 반구대암각화를 죽어 있는 돌덩이로 보고 있으니 양쪽이 모두 어깨에 힘을 준다. 살아 있다고 믿으면 호흡 하나조차 허용하지 않는 프랑스인들을 이해할 수 있을 일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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