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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현재 학성교에서 바라본 반구동 일대의 전경. 김정훈기자 idacoya@
   
▲ 학성교 오른쪽으로 반구1동이 자리하고 있고, 사진 중앙 멀리로는 반구2동이 자리한 모습이 보인다. 사진은 1990년대 전경.

 

 

 

 

 

 

 

내 이름은 경상도 울산 큰애기
상냥하고 복스런 울산 큰애기
서울 간 삼돌이가 편지를 보냈는데
서울에는 어여쁜 아가씨도 많지만
울산이라 큰애기 제일 좋대나…

1960년대와 1970년대 국민들 사이에 유행한 대중가요 <울산큰애기>는 울산에서도 반구동 처녀들을 칭송한 노래로, 전국 어느 지역보다 이 마을 처녀들이 인물이 좋고, 마음씨가 좋음을 노래한 것이라 한다. 그 때만 하더라도 이 마을은 다른 마을에 비해 농사가 잘돼 쌀 서 말 먹지 못하고 시집가던 보릿고개 시절에도 이 마을 처녀들은 예외였다는 것.

#맛좋은 농산물 전국서 유명

이 마을은 지리적으로 마을 안쪽에는 약사천이, 동쪽으로는 동천강이, 남쪽으로는 태화강이 유유히 흐르고, 강 접목 지점에는 두루미·갈매기 등 철새들이 날아들어 조사 집단도래지로 지정돼 있다.
 이처럼 강 유역에 위치한 덕으로 농토가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비옥해 이 마을 주민들은 무·파·마늘 등을 경작하며 살았는데, 이 곳에서 생산되던 배추가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탔다. 배추가 잎이 얇고 겹겹이 싸여 속이 좋은 데다 당도도 높아 동해안 일대에서는 가장 맛있는 것으로 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근 지역은 물론 멀리 안동·구미·영천 등 경북지방의 상인들도 반구동 배추를 사기 위해 몰려들었으며, 서울 용산 시장과 청량리 시장에서도 '울산 반구동 배추'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이와 함께 지금의 반구2동인 구교마을에서 생산되던 산수박과 참외도 이름이 났다. 택지로 개발되기 전 야산이었던 현재의 반구2동사무소 일대는 햇볕이 잘 들고, 소나무 숲으로 바람도 충분해 과일재배지로서는 최적의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여기에서 생산되는 수박과 참외는 다른 어떤 지역의 것보다 당도가 뛰어나고 맛이 좋았다. 주민들은 "여름철이면 이 곳 수박과 참외 맛을 보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로 동네는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전한다.
 이런 윤택한 경제적 여건 덕분에 반구동 처녀들의 외모는 타 지역보다 뛰어났는데, 여기서 '울산큰애기'라는 애칭이 생겼다.

 배추·수박 등 맛보러 '문전성시'
윤택한 환경에 아름다운 처녀들


 전국적 명성을 얻던 농산물 재배지인 이 마을은 지난 1977년 12월부터 시작된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대부분 택지로 변해 주택과 각종 건물들로 메워졌다.
 반구동이 지금의 주거타운으로 모습을 갖춘 것은 택지가 개발된 이후인 1980년도부터다. 특히 울산지역의 대표 사업장인 현대자동차 등과 가까운 지리적 여건으로, 현대계열사와 협력업체 직원들의 주거지로 각광을 받으면서 유입인구가 급격히 늘어나 1990년대 중반에는 반구1·2동을 합쳐 주민이 모두 3만5,000명에 이르기도 했다.

 또 이 마을은 반구로터리를 중심으로 염포로, 병영로 등 사통팔달 체계의 도로망을 갖춰 울산의 중구, 남구, 북구를 잇는 교통요충지 역할을 하고 있다.
 반구동은 역사적으로 호국의 얼이 깃들여 있는 역사의 고장이기도 하다. 멀리 신라 때는 신라의 변방으로 학성동과 더불어 울산중심지 마을이었으며, 임진왜란 때는 의병들이 나라를 지키지 위해 분연히 일어선 고장이다.
 

 

   
▲ 내황경로당 옆에 자리한 공덕비. 조선시대 목관으로부터 세금을 삭감받은 주민들이 그 보답으로 세운 비석이다. 울산신문 자료사진

#반구동의 유래

반구동의 옛 이름은 '구강'이다. 임진왜란 때 울산·경주 등지의 의사들이 모여 결사동맹을 하고 의병을 일으킨 뒤, 그 동맹을 '구강회맹'이라 했던 것에서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있다.

 이 구강이라는 명칭은 당시에는 동천강이나 태화강 토사가 오늘날처럼 많이 퇴적하지 않아 이 마을 주위가 바다였던 까닭으로 갈매기들이 많이 날아들었던 데서 연유한다. 그리고 '반구'라는 지명은 조선 중기 무신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순직한 퇴사재 이응춘이 지금의 반구정 마을에 정자를 세우고, 그 이름을 '반구정'이라 명명한데서 비롯한다.

 반구동은 원래 여러 마을로 갈라져 있었다. 숙종 34년(1708년)의 기록을 보면, 구교동리·반구정서부리·반구정동부리·서낭당리 등 4개 마을로 나눠져 있었다. 영조 41년(1765년)에는 구교동리·서부리·동부리·해성리·동령리 등 5개 마을로 갈랐다가, 정조 때(1777년)는 서부리·동부리·동령리는 같고 구교동리를 구교리로, 해성리는 내성황당리로 고쳐 불렀다.

 

    그러다가 1849년부터 구교리와 동령리, 해성리 등 3개 마을로 나눴고, 고종 31년(1894년)에 다시 구교동·구정동·동부동·내황동으로 했다. 1911년 구교동·서부동·동부동·내동동 등 4개 마을로 나눠 이름을 바꾼 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합해 반구리라는 지명으로 굳어졌다.
 이후 반구동은 학성동에 편입됐다가 1982년 분동됐으며, 1992년 주거밀집 지역으로 인구가 급격히 불어나 행정관청의 관할이 커지면서 반구1, 2동으로 갈라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양한 유적이 있는 역사고장

울산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인 구강서원은 효종 10년(1659) 배두첨을 비롯한 11명의 유림들이 출자해 서원건립을 발의한 것이 그 시초이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호응해 돈과 곡식을 거둬 오다가 현종 8년(1668) 가을에 학성 서쪽에 터를 잡아 일부 건물을 지어 모습을 보였따. 그러나 이듬해 불이나서 소실됐다.
 그 뒤 숙종 4년(1678) 지금의 서원마을에 다시 건축물을 지었는데 <구강서원창건기>에 "숙종 1년(1675)에 서원을 지을 재목을 벌채해 운송했다"고 기록돼 있는 것으로 보아 서원을 재건립하는 데 3년 정도가 소요된 것으로 보인다. 숙종 5년에 각각 고려 말기와 조선 중기에 문신으로 이름을 떨친 포은 정몽주, 회재 이언적 두분 선현을 모시게 됐다.

 숙종 20년(1694) 서원에 대한 국가의 공인절차로 국왕으로부터 현판과 서적, 토지, 노비 등을 받는 사액이 내려져 그 권위를 인정받아 지방 사설교육기관으로서 명성을 얻었다.
 반구정 토성지는 신라 말 태화강 하류의 지리를 추정케 하고, 반구동 일대가 신라의 변방으로 울산 중심지였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단초가 되는 귀중한 향토유산이다. 이 토성지는 반구1동 290-2번지 일대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택지로 개발돼 아파트 등이 들어서 있다.

조선 중기 '반구정' 서 이름 유래
구강서원·효문산성·토성 등 자리

 1991년 아파트 건축공사 때 일부 드러난 것을 조사해 토성지임을 확인하기 전에는 왜성으로 보아 '반구정 왜성'이라 일컫기도 했다. 이는 상고시대부터 한말까지 문물제도를 총망라한 백과사전 격인 <증보문헌비고>에 '반구정성 비국담록유왜성'이란 기록이 있고, 조선 인조 때 문신인 신흠의 시문집 <상촌집> 권56지에도 '좌군위 반구정적루'라고 돼 있는 것을 두고 그렇게 비정한 것이다.

 그러나 조사결과 반구정 토성지의 실체는 울산성지고에 나타나는 장제(기다란 둑)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 장제는 속칭 '나발등'이라 하던 것인데, 울산왜성 제2본성의 동북 지점에서 동으로 뻗었던 것이다. 성지 방위를 위해 축조된 이 장제는 길이가 218m 50㎝, 상폭이 14∼16m였다.
 그리고 울산의 이 지역 일대는 신라 서울로 들어가는 물목이었기 때문에 이 곳 해면으로 둘러싸인 곳에는 여러 개의 성을 축조했다. 반구정 토성을 비롯해 이 곳 바다 건너편인 효문산성과 관문성, 남구 신정동 은월봉의 사포진성, 문수산 정상의 굴아화성, 학성동 학성산의 토성이 그것이다.
 최재필기자 uscjp@ulsanpres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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