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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인들이 존경하는 인물 가운데 고 유병진 판사가 있다. 유 판사의 판결 일화로 유명한 것이 6.25 남북전쟁 중에 치러진 소위 부역자 재판이다. 부역자 재판이란 당시 인민군 치하에 있던 시민들을 기소하여 인민군에 대한 부역의 정도에 따라 처벌을 한다는 취지의 재판이다. 당시 유 판사는 "적 수중에 떨어진 시민에게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며, 총 한 자루 없이 항거하다 죽으라고 할 수는 없다"는 판결문을 남기며 대부분의 시민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또 하나의 일화는 이승만 정권 때 조봉암 사건에 대한 1심 판결이다. 서슬 퍼런 이승만정권의 일당독재 시절 이념과 사상을 다루는 재판에서 유 판사는 철저하게 원칙과 신념을 기준으로 권력이라는 외압에 굴복하지 않고 주범을 제외하고 대부분에 무죄를 선고했다. 결국 유병진은 이 일로 인해 법관 연임심사에서 탈락했다.
신정아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한 김정중 서부지법 영장전담판사가 화제의 인물이 되고 있다. 영장기각 소식이 알려진 후 언론과 인터넷 포털사이트에는 김 판사의 약력과 함께 '평소 원칙을 지키고 소신 있는 판결을 하는 판사'라는 주위의 인물평까지 소개되고 있다.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신씨가 유명인이 아니고, 이번 사건이 일반적인 사건이라면 과연 영장이 발부될 수 있었겠느냐"며 "판단할 수 있는 기록에 없는 혐의를 두고 증거 인멸이나 도주할 우려가 있다고는 판단할 수 없다"고 밝혔다. 미란다의 사례를 보듯 피의자의 인권을 법리적 원칙으로 판결한 김 판사의 법률적 행위가 언론에 밝힌 자신의 말 때문에 흔들리고 있다. 법관은 오직 판결로 말 한다. 판결은 법리의 적용과 그에 따른 법적 판단만으로 행하는 존엄한 법률행위이다.
문제는 법관이 판결로 말하지 않고 말로써 판결을 해설할 때이다. 말은 상황에 따라 오류를 범할 수 있고 뱉고 나면 다시 주워 담기 어렵다. 판결은 재판부가 몇날며칠을 숙고하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오류를 검증하는 절차를 거치지만 말은 언제나 감정의 개입이 있을 수밖에 없다. 유병진 판사가 원칙을 지킨 판사로 남는 것은 그의 말 때문이 아니라 판결문 때문이다. 신정아씨에 대한 영장기각이 톱뉴스가 되는 것도 이미 그녀가 일반인 '신정아'가 아니라는 이유이다. 이미 일반인이 아닌 신씨를 "일반인이라면~"식의 가정법을 동원해서 전 국민에게 답변을 요구하는 김 판사의 질문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법관이 말로써 자신의 판결을 설명하는 행위 자체가 당혹스럽기도 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