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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조 최고의 문장가로 알려진 서거정은 탄탄한 집안과 뛰어난 처세술로 당대 조선문단을 쥐락펴락했으나 사육신 김시습과의 냉철한 비교로 사림에서 호평을 받지 못하고 있다. 사진은 서거정이 울산을 방문했을때 동헌이 있던 언양읍성 전경. 유은경기자 usyek@

<울주 서쪽 물가의 태화루/ 거꾸로 비친 그 그림자 아득히 푸른 물줄기에 잠겨 있네./ 까마득하여 처음에는 학의 등에 탄 것인가 여겼더니/ 흐릿하여 문득 자라 머리에 오른 것을 알겠네./ 산빛은 가까이 계림과 닿아 있는데/ 바다 기운은 멀리 대마도에 이어지네./ 만 리까지 다함없는 것이 올라와서 보는 흥취일진대/ 하늘에 가득한 비바람으로 난간에 기대어 시름하네.> 조선 성종 때 서거정(徐居正)이 울산의 태화루에 올라 바라본 풍광과 감회를 묘사한 '울산 태화루(蔚山 太和樓)'란 시(詩)다.

 

 

 

   
▲ 언양읍성과 동헌등이 나타나 있는 울산의 고지도.

조선 500년을 통틀어 서거정만큼 관운을 좋았던 이도 흔치 않다. 비록 영의정에는 오르지는 못했지만, 23년간을 문형(文衡)으로 있었다. 능력이 빼어나기도 했지만, 시류를 건느는 재주가 남달랐던 탓이다. 같은 시대를 살다간 열다섯살 연하의 김시습(金時習)과 흔히 비교된다. 살아서는 영화를 누렸지만, 죽어서는 폄하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죽은 뒤에 사림의 사표가 된 김시습에 비교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의 업적은 찬연히 빛난다. 경상도 순찰사를 지내지 않았다면, 조선문단을 쥐고 흔든 그가 울산에 올 리가 없었으리라.
 
#경상도 순찰사로 울산ㆍ언양 순시
서거정은 성종 9년(1478년) 경상도 순찰사로 도내를 순행했다. 다음해에 울산에도 들러 종사관 이세우(李世佑)와 사천현감으로 있던 울산의 양희지(楊熙止)의 안내로 태화루에 올랐다. 태화루의 풍광은 만리에 미치지 못함을 한탄할만큼 빼어난데도, 때 마침 비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쳐 그 흥취를 느끼지 못함이 안타까워서 시름에 잠겼다. 첫 머리의 시에 그런 마음을 절절히 표현했다.
 사천현감 양희지는 본관은 중화(中和)로 대구에서 살았으나, 집안이 가난해서 떠돌아 다녔다. 울산에 와서 학성이씨 시조 이예의 아들 종근의 딸과 결혼하여 울산에 정착했다. 그런 연유로 울산 사람이 된 것. 대사간과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도승지로 직제학을 겸임했으며, 한성부우윤과 우빈객을 지냈다. 서거정이 울산에 들렀을 때, 태화루에 함께 올라 '사상(使相) 서거정과 함께 태화루에서 놀면서 그의 시의 운(韻)을 따라 짓다(次徐使相遊太和樓韻)'란 시를 지었다. 그의 문집 '대봉집(大峰集)'에 실려 있다.
 

 

 

 

 

   
▲ 서거정이 썼다고 알려진 태화루 현판. 그러나 여러 사료로 미루어보면 사실이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태화루' 시와 '언양의 형세'글로 지어
서거정은 태화루의 현판을 썼다고 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일제강점기 때인 1935년에 나온 '울산읍지' 구해우조에 '태화루는 객사의 남쪽 문루인데,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이 편액을 썼다'고 기록돼 있다. 그로서 태화루 현판은 서거정이 쓴 것으로 됐던 것. 그러나 영조 때 울산 최초로 만들어진 읍지 '학성지'를 비롯한 1935년 이전에 만들어진 10여종의 읍지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고 한다. 후대인 1935년에 그것도 원(原)태화루가 아닌 객사인 학성관의 남문루인 모칭(冒稱) 태화루의 현판을 썼다는 것은 시기적으로도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울산에 왔을 당시 서거정은 순찰사로 경상도내를 순행하고 있었으므로 언양에도 들렀다. 언양현 동헌(東軒)에서 <산의 모양은 북쪽으로 신라의 도읍(경주)에 조아리고/ 물의 모습은 동쪽으로 기울어 울산 바다로 흐르네(山形北拱羅都去 水勢東傾蔚海流)>란 시를 지었다. '동국여지승람 권23'의 '언양현 제영조'에 실려 있다. 언양현 동헌을 읊은 시(詩)라고 후세 사람들은 말하지만, 본래 제목이 없는 작품이다. 언양현 동헌을 읊은 것이라기보다는, 언양의 산과 물의 형세를 그린 작품임에 분명하다.
 
#명문가 출신으로 23년간 문형(文衡) 맡아
서거정은 세종 2년(1420년)에 태어나 성종 19년(1488년)에 죽었다. 자는 강중(岡中), 호는 사가(四佳)ㆍ정정정(亭亭亭),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조선 초 최고의 학문과 문벌을 자랑하며 조선 건국에 문물을 정비하는 일을 담당한 권근(權近)이 외할아버지이고, 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최항(崔恒)이 매형(妹兄)이다. 외할아버지 권근은 조선의 초대 대제학을 역임했기에 조선 초기의 사대부 문인 중에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이 권근의 아들 권제는 물론 외손 이계전을 거쳐 최항 그리고 서거정까지 대제학을 역임했다. 문형(文衡)이라 불리는 대제학은 과거시험을 총괄하기 때문에 당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응시자는 대제학의 문학이념을 좇지 않을 수 없게 마련이다. 그런 대제학을 한 집안에서 80-90년간을 독점했으니, 권근 일가의 위세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높았다. 서거정 개인으로서는 능력이 뛰어났지만, 명문 출신이라는 신분 또한 그의 출세에 큰 보탬이 됐을 것이다.
 서거정은 어릴 때 신동으로 이름을 떨쳤다. 세종 20년(1438년)의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해서 성균관에 입학했으나, 과거에는 떨어져 울분의 세월을 보냈다. 25세인 세종 26년(1444년)에 문과에 3등으로 합격해서 벼슬길에 나섰다. 48세인 세조 13년(1467년)에 대제학에 올라 무려 23년간을 지냈다. 그의 능력에다 무난한 성격 때문에 세종부터 성종까지 여섯 임금을 섬기며 46년간을 벼슬길에 있었다.
 

 

 

   
▲ 서거정의 글씨.

#김시습과 비교되는 삶과 빼어난 詩 창작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계유정난에도 권람과 한명회, 신숙주 등과 함께 수양대군 편에 섰다. 생육신으로 전국을 떠돌며 지낸 김시습과 철저하게 대비되는 삶을 살았다. 김시습과는 오랜 인연의 끈을 놓지 않았다. <내 그대를 사랑하니/ 본래 면목이 참되기 때문이지./ 그대의 도는 혜능에게서 나왔고/ 그대의 시는 무본에 가까워라./ 높은 뜻으로 이미 소문의 주인공이 되었고/ 맑은 이야기로 사람을 감동시키네./ 사귀어 놀게 되니 너무나 다행스러워라/ 저 세상에 가서도 인연을 다시 맺으리라.> '청한 스님 김시습에게(寄淸寒)'란 작품이다.
 학문이 깊어 천문과 지리, 의약, 풍수, 복서(卜筮)에까지 관통했으며, 문장에 일가를 이루고 특히 시(詩)에 빼어났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많이 시를 지은 시인 중에 한 사람으로 꼽힌다. 생전 성종 때에 문집이 간행됐고, 사후 숙종 때에도 문집이 나왔는데도 온전한 모습으로 전하지 않는다. 현재 문집에 전하는 시는 6천여수(首)에 이른다. 편찬에 참여한 책은 '경국대전(經國大典)'과 '동문선(東文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 아홉 종에 수백권에 이른다. 개인 저서로는 '사가집(四佳集)'과 '필원잡기(筆苑雜記)'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 등이 있다.
 <금빛은 수양버들에 들고 옥빛은 매화를 떠나는데/ 작은 연못의 봄물은 이끼보다 푸르다./ 봄날의 근심과 흥취 가운데 어느 것이 깊은가?/ 제비가 오지 않아 꽃이 아직 피지 않았네. (金入垂楊玉謝梅 小池春水碧於苔 春愁春興誰深淺 燕子未來花不開)> 생동하는 봄날의 흥취를 단아하게 그린 '봄날(春日)'이란 시다. 감각적이고도 참신한 시정신을 엿볼 수 있다. '가랑비(小雨)'란 시도 그렇다. <아침부터 오는 가랑비가 더욱 보슬거려/ 지는 버들개지와 흩날리는 꽃잎이 주렴에 가득해라./ 구십일 봄날도 이제 벌써 저무는데/ 앓은 뒤라서 술잔을 힘없이 거퍼 붙잡네. (朝來小雨更庶纖 落絮飛花滿一簾 九十日春今已暮病餘杯酒懶重拈)>
 

 

 

   
▲ <산의 모양은 북쪽으로 신라의 도읍(경주)에 조아리고/ 물의 모습은 동쪽으로 기울어 울산 바다로 흐르네> 서거정이 울산을 순시했을때 언양일대의 형세를 보고 지은 글이 동국여지승람에 남아 전한다. 사진은 영양 언삼교에서 바라본 태화강 줄기.

#외조부 권근과 함께 '태화루' 기문을 지어
울산에 왔다간 5년 뒤 성종 15년(1484년)에 울산군수 박복경(朴復卿)이 태화루를 중수했다. 그 다음해에 양희지(楊熙止)가 서거정에게 중수기를 청하자 '태화루중신기(泰化樓重新記)'란 기문을 지어 보내왔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2 '울산 누정'조에 실려 있다. "일찍이 남쪽 지방을 유람하면서 촉석루와 영남루와 영호루 등을 둘러본 것을 들면서, 마지막으로 울산의 태화루에 오른 것을 회상한다. 정포의 팔영과 이곡의 글과 그리고 외할아버지 권근의 기문 등이 있었으나, 그 판액이 전하지 않음을 안타까워한다. 한양에 돌아와 울산에서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때 마침 양희지가 울산군수 박복경이 태화루를 중수한 사실을 알리며, 좋은 글을 지어줄 것을 요청해서 글을 지어보낸다'는 내용을 적고 있다.
 당대에 서거정을 평가한 기준 중에 대표적인 것이 오랫동안 대제학을 지냈다는 것이다. 대제학은 문단을 좌지우지하는 자리였던 만큼, 자타가 인정하는 최고의 문장가가 맡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문필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력에다 관운까지 지녀야 했다. 보신의 능력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과정에 그가 집현전의 옛 친구들과 갈라선 것을 보면 그의 처세력을 알 수가 있다. 김시습과는 달리 사림(士林)에게 호평을 받지 못한 이유다. 객관적으로 능력을 인정받고 있던 김종직(金宗直)에게 후임 대제학 자리를 물려주지 않은 것도 한 가지 원인이 되지 않았으랴.
 그래도 그는 일생동안 지녀야 할 마음가짐을 '독좌(獨坐)'란 시에서 이렇게 읊었다. <찾아오는 손님도 없이 혼자 앉았노라니/ 빈 뜨락에는 빗기운만 어둑어둑하구나./ 고기가 건드려 연잎이 움직이고/ 까치가 밟아서 나무 끝이 흔들리네./ 거문고가 그쳐도 줄에는 아직 소리가 남았고/ 화로가 차가워졌지만 불은 그대로 남아 있네./ 진흙탕 길이 드나드는 발걸음을 막으니/ 오늘은 하루 종일 문을 닫는게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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