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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특정공업지구 설정하는 날 박정희 장군 일행이 도열해 있는 학생들에게 환영의 답례를 하면서 기공식장에 입장하고 있다.

내년 2월 3일이면 울산공단이 만들어진지 50년이다. 울산으로서는 그야말로 역사적인 날이 아닐 수 없다. 울산시민 뿐만 아니라, 전 국민도 감회가 새로울 수 밖에 없으리라.

    울산광역시는 울산공단 50주년을 맞아 4개 분야 17개 기념사업을 펼치기로 했다. 내년 1월 27일부터 2월 3일까지 8일간을 울산공업센터 50주년 기념주간으로 정하고, 울산 전역에서 다양한 기념행사를 열기로 한 것이다.

 그렇다면 울산공단은 언제 시작된 것일까? 일제강점기의 울산 공업도시계획에서 비롯됐다. 일제는 대륙침략이 본격화된 1930년대 말에 조선공업화와 병참기지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울산을 공업도시로 개발키로 했다. 조선축항주식회사 대표 이케다 사다오(池田佐忠)가 울산공단을 만드는 데에 앞장섰다. 그는 1936년에 울산의 축항(築港)과 공업도시계획을 구상한다. 울산의 입지조건으로 15가지를 내세웠다. 현재까지도 울산이 대단위 공단으로 성장하는 밑바탕이다.

 지형조건이 공단으로 개발하기에는 최적이라고 봤다. 울산만이 항만으로서의 최고의 조건을 갖추고 있고, 또 연안의 지질과 넓은 배후지를 갖고 있는 점, 기후조건도 우수한 것으로 꼽혔다. 항구로서의 입지가 매우 양호하다고 했다. 연락항과 공업항, 무역항, 어항으로서 모두 가능하고, 공항으로도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봤다. 비행장은 이미 우리 나라 최초로 1928년에 삼산에 건설돼 있었다. 그밖에 용수와 동력, 원료수급, 노동력 등의 조건도 최적이라고 평가했다.

 1940년에 인구 50만을 수용하는 공업도시계획을 만들었다. 도시계획지역은 울산읍과 방어진읍, 하상면, 대현면의 1,883만4,000여평. 대현면 일대는 제1기 공업지역으로, 하상면 일대는 제2기 공업지역으로 만들기로 했다. 대현면의 배후지는 주거지로, 매암동과 용잠, 용연동 주변의 해안은 특수지역과 준설구역으로 지정해서 항만시설을 갖추기로 했다. 도시확장을 위해 하상면 인근 서북쪽은 시가예정지로 했다. 그해 2월 20일에 조선총독부에 울산시가지계획 특허신청을 냈다.

 그러나 공업도시계획은 실제로는 이케다 사다오가 공장부지를 확보키 위해 1937년 8월 20일에 조선총독부에 대현면의 갯벌 108만평에 대한 매립허가를 신청하면서 시작됐다. 매립허가는 1941년 1월에 났으나, 변경 등의 절차를 거쳐 1942년 12월에 최종 인가가 났다. 한편으로 1939년에는 포화상태의 부산-시모노세키간의 관부연락선 항로를 대체할 항로계획을 세웠다. 울산과 일본 유야(油谷)를 연결하는 유울(油蔚)연락기지계획인 제2관부연락선. 그에 앞서 조선축항은 1937년에 총독부에 울산축항계획 면허를 냈다. 염포 앞 바다에 울산항을 만드는 것으로, 1941년 3월 초에 허가를 받았다.

 철도는 유울연락기지로 계획된 염포 앞 바다에 만들어질 울산항과 기존 병영역을 연결키로 했다. 울산항-병영역-경주-대구를 거쳐 중국 대륙으로 이어지는 연락노선이 완성되는 체계다. 공업도시계획에서는 기존 울산역에서 공단간에 철도노선을 갖추는 구상을 했다. 울산역과 부산으로 연결되는 새로운 역을 야음동 근처에 만들고, 연암동 조차장에서 3개의 노선으로 나눠져 여천동과 매암동, 장생포를 연결하는 것. 공업용수는 태화강 상류 범서에 저수지를 만들어 확보키로 했다. 다운동에는 제방을 쌓아 용수를 취수한 뒤, 신정동에서 끌어올린 태화강의 복류수와 합쳐 배수키로 했다.

 조선축항은 동양척식주식회사와 함께 공장부지로 대현면과 방어진읍 일대 235만여평을 매립키로 했다. 또 부지매입에도 나섰다. 여천동의 36만7,000여평과 고사동의 12만9,000여평, 매암동의 61만6,000여평 등 109만여평을 사들였다. 때 맞춰 1936년에 우리 나라 최초로 원산에 세워진 조선석유주식회사 정유공장의 시설 일부가 울산에 옮기게 됐다. 동양척식은 1940년 고사동에 정유공장을 건설할 부지매입에 들어갔고, 1944년에 15만평에 연간 20만톤 정제능력의 정유공장 공사에 들어갔다. 70%의 공정상태에서 2차대전이 끝남에 따라 공사는 중단됐다. 조선축항과 동양척식이 사들인 공장부지는 1945년 광복이 되자 미군정청이 관리하다가, 1948년 정부가 수립되면서 국유지가 됐다. 1962년 정부가 울산공단을 결정하고, 개발에 나설 때 재원이 부족한 상태에서 광대한 그 국유지가 큰 도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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