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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날을 앞두고 수년전부터 자취를 감춘 기념행사 부활이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서글픈 일이지만 스승의 날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 반갑고 즐거운 기념일이 아니다. 언제부턴가 교사나 학부모 모두가 부담스러운 날로 자리해 기념행사조차 조심스럽게 준비해야하는 날이 되어 버렸다.
 스승의 날이 실종된 것은 우리 교육의 건강지수가 중병에 걸려 있다는 것과 다름 아닌 일이지만 이를 바로잡아 사회 전체가 함께 기념하는 의미 있는 날로 만들어가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바로 이 같은 사실이다. 스승의 날에 대한 무감각증과 차라리 없으면 좋겠다는 발상이 우리 교육을 점점 어둡고 혼탁한 길로 빠져들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자 초년병 시절, 어휘 하나를 잘못 쓴 일로 데스크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은 적이 있다. 바로 그 어휘가 '선생'이다. 어느 초등학교의 행사기사로 기억하는 글을 쓰면서 아무개 선생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당시 데스크였던 선배는 그런 나를 두고 '선생'과 '교사'의 구분도 못한다며 가혹할 만큼 심한 야단을 쳤다. 그 때만해도 선배의 그런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자리에 돌아와 한참을 생각하면서 스스로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한 선생이라는 단어는 직업으로서의 교사와는 너무나 다른 인류의 오랜 내공이 축적된 함의가 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교사보다는 선생, 스승이 많은 사회는 건강하다. 우리의 삶 속에서 스치듯 만나는 단 한명의 교사가 선생의 모습으로 남아 스승으로 자리할 때 만권의 책보다 깊고 넓은 의미가 된다. 교사에겐 학생이 있을 뿐이지만 선생에겐, 아니 스승에겐 제자가 평생을 따라다닌다. 비록 스승이 사라지고 교사만 남은 학교라는 이야기가 풍문으로 떠돌지만 여전히 우리는 학교현장에 더 많은 선생이, 더 많은 스승이 우리 아이들을 이끌어 주길 희망하고 있다.

 얼마 전 고등학생인 아들 녀석에게 두 편의 영화를 권했다. '굿 윌 헌팅'이라는 영화와 '죽은 시인의 사회'였다. 굳이 오래된 두 편의 영화를 아들 녀석에게 권한 이유는 그 속에서 바로 선생, 스승의 모습을 만났던 기억 때문이었다. 수학천재 이야기를 다룬 굿 윌 헌팅은 미국의 대학도시를 배경으로 불우한 천재의 청년기를 그린 이야기다. 이 영화는 하층 노동자인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 모두를 잃어버리는 큰 고통을 겪으며 성장한 천재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천재로부터 천재성을 발견한 것은 한 수학교수였지만 그는 천재를 품을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했다. 거친 표현법에 감춰진 천재성과 그 바닥에서 신음하는 사랑에 대한 갈증을 스스로 뚜벅뚜벅 발견하게 만드는 것은 비슷한 성장통을 가진 원로 수학자 로빈 윌리엄스였다.

 윌에게 MIT 수학교수는 교사였지만 스승은 로빈이었다. 참고 지켜보며 스스로 길을 찾게 만드는 스승의 모습은 정물화 같다. 느낌표보다 물음표를 자주 던지는 스승에게 괴짜 천재는 결국 닫힌 세계로부터 자신을 꺼내 자신의 재능을 세상과 마주하게 한다. 그 괴짜 제자에게 스승이 했던 말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다. "윌, 너는 천재다. 그것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인정한다. 하지만, 네가 갖고 있는 지식이란 죽은 지식이다. 너는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잘 안다고 하겠지만 시스틴 성당 천정의 미켈란젤로 작품을 올려다보았을 때 느껴지는 바로 그 감동을 모른다. 너는 죽어가고 있는, 너무도 약해서 부스러져 버릴 것 같은, 그런 사랑하는 여인의 손을 잡고 지켜봐야 하는 그 마음을 모른다. 윌, 너는 고아다. 만약 내가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었기 때문에 고아로서 겪었던 너의 어려움과, 고아인 네가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고 떠들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런 얘기들은 엿 같은 책만 들추면 다 나오는 얘기다. 그런 것으로부터는 너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 수가 없다. 왜냐면 너는 너 자신에 대해 얘기하는 것에 공포를 느끼니까. 잃어버릴 것을 먼저 두려워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인용이 길었지만 이 장면은 스승이 제자의 마음을 열게 한 통과의례 같은 의식으로 전해진다. 마치 웰튼 아카데미에 부임한 영어교사 존 키팅이 수레바퀴 아래서 신음하는 학생들을 향해 '카르페 디엠(현재를 즐겨라. 너의 인생을 특별하게 만들어라)'이라고 외치는 웅변과 맥을 같이 한다. 죽은 시인의 사회를 벗어나 살아 있는 나와 대면하는 일은 교사가 인도할 수 있다. 그 교사의 노력이 헛되지 않는 사회가 스승을 만든다. 그래서 지금 우리 사회에 떠도는 스승이 사라졌다는 말은 인정할 수 없다. 오히려 우리 사회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수많은 윌리엄스, 열정적인 키팅을 스승으로 대접하지 않은 사회가 스승을 사라지게 한다는 쪽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수많은 기념일 가운데 하나인 스승의 날이 그저 그런 기념일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를 만든 어제의 선생님을 기억하는 날이 되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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