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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학 울산푸른학교에서 만난 이미숙(가운데 오른쪽) 시인은 학생들에게 감동을 전달받고 있다고 했다. 사진 속 캄보디아에서 시집온 이주여성(맨 오른쪽)과 시어머니(맨 왼쪽)가 이씨에게 함께 한글 교육을 받는 모습도 이채롭다. 이창균기자 photo@


제자 한명 한글 자원봉사서 담임으로 전업
자체 교재 만들어 학습…일기장 첨삭 지도
"못 배운 한 풀어준 내 인생의 은인입니다"


신정지하도를 건너 울산푸른학교로 가는 길을 걸으면서 이탈리아의 작가 에드몬도 데 아미치스가 1886년에 발표한 동화가 떠오른다. 사랑의 학교. 초등학교 4학년인 엔리코의 눈으로 바라본 담임선생님과 친구들의 이야기다. 마음으로 전해지는 친밀감은 어떠한 지식보다 값지다는 사실을 이야기 하는 이 동화가 푸른학교 이야기를 듣고 찾아나선 길에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성취와 중독

성취감. 최선의 노력을 다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매력적인 단어다. 성취감은 보는 이로 하여금 중독을 불러일으킨다. 여기, 성취감을 한껏 즐기고 있는 제자들로부터 전해오는 희열에 중독된 어느 여류 시인이 있다.
 울산에서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미숙(52)씨. 7년전 이씨는 한 지인으로부터 어느 야학의 자원봉사 부탁을 받았다.
 야학은 여러 사정으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이들이 배움의 한을 푸는 공간이다. 예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상당부분 주간에 이뤄진다.

 이 여류 시인이 부탁받은 야학 울산푸른학교(교장 이하형·남구 신정동)에 첫 강의 나섰을 때, 너댓평 정도의 교실에는 한글을 깨우치지 못한 여성 한 명만이 자리하고 있었을 뿐이다.
 "60대의 할머니가 한글을 배우겠다며 공손한 자세로 앉아 있었어요. 기대와 두려움이 섞여 있는 그 할머니의 눈동자는 아직도 선명합니다. 이제는 제게 둘도 없는 언니가 됐죠."
 할머니는 시간이 흐르면서 철자와 단어를 하나씩 깨우쳐 갔다. 할머니의 성취감을 바라보면서 시인은 헤어나지 못할 '희열감'에 서서히 중독되고 있었다.
 
#시인의 열정

그렇게 작게 시작한 시인의 자원봉사는 '한글을 깨우쳐 주고 싶어하는 열망이 가득하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인근의 까막눈 이들의 희망이 되어 갔다. 이씨도 파트 타임 자원봉사에서 한 반을 맡는 담임으로 전업했다.
 은행에 갈 때마다 오른 손에 붕대를 감고 간 할아버지, 남편과 자식들에게 타박받던 주부, 정치인 남편에 누가 될까 아무도 모르게 4년을 마음 졸이며 야학에 다닌 사모님, 어느날 갑자기 동네 '방앗간' 간판을 읽었던 아줌마, 간판 읽기가 취기가 된 아저씨. 이들 외에 많은 까막눈 이들은 이씨에게 희열을 안겨줬다.

 "배우지 못한 한을 생각하면 제가 느끼는 불편함은 정말이지 너무 보잘 것 없었어요. 그 사람들이 제게 주는 희열은 그 어떤 것으로도 느낄 수 없는 감동입니다."
 학생들의 한을 풀어준다는 일념은 고스란히 열정으로 전이됐다. 학생들이 점차 늘어나자 기존 교재로는 다양한 수준을 요구하는 학생들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매일 수준에 맞는 프린트물을 만들어 직접 교재로 활용했고, 나중에는 프린트물을 엮어 수준별 교과서를 직접 만들어 학생들에게 나눠줬다. 기초, 중급, 고급 한글 교재를 세분화한 이씨의 수준별 맞춤 교과서는 지금까지 무려 9권이나 만들어졌다.
 학생들에겐 매일 일기를 쓰게 하고, 학생들의 일기장 하나하나에 첨삭지도를 했다. 이씨로부터 지도를 받은 한 할머니의 일기장은 유명 출판사의 이름을 달고 두 권의 책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여류 시인이 까막눈 이들에게 전해준 것은 '지식'이라기 보다 '할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이었다.
 
# 마음의 스승

이씨의 열정은 누구보다 학생들이 먼저 알아봤다. 그리고 그에게 보내는 신뢰는 무한하다.
 푸른학교의 한 학생은 "끊임 없이 공부를 하게끔 아이디어를 냈다. 그냥 따라가기만 하면 어느 순간 낱말이 눈에 들어왔다"며 "나중에는 '선생님이 우리를 위해 이렇게 애쓰는구나'하고 감동을 받게 됐다"고 말했다.
 야학에 다니는지 자식들도 모른다는 한 학생은 "이 선생님은 그냥 선생님이 아니라 저의 가장 부끄러운 부분을 다 알고 메워주시는 분이다"며 "이제는 모든 걱정거리를 다 털어놓는 유일한 사람이며, 내 한을 풀어준 은인이다"고 했다.

 또 다른 학생은 "지인에게 휴대폰 문자를 보내기 전에 선생님에게 먼저 보내서 맞춤법 등을 확인받는다"며 "선생님에게 답장받은 문자를 그대로 친구에게 보내면 내가 글을 모르는 걸 절대 눈치채지 못한다"고 비밀을 밝혔다.
 중학교 손자의 손에 이끌려 푸른학교 학생이 된 김모 할머니는 이번 스승의 날을 앞두고 삐뚤삐뚤한 글씨로 편지를 보냈다.

 "손자 따라 공부하러 간 덕분에 요즘에는 사는게 참 행복합니다. 이 모두가 저에게 배움의 값어치를 알게 해 주시고 길잡이가 되어 주신 선생님 덕분입니다...... 더욱더 열심히 공부해 더 멋진 학생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큰 가르침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스승은 배우는 사람의 마음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박송근기자 s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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