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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인이 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지난 1999년 6월 소 500마리를 실은 트럭과 함께 판문점을 통해 방북했을 때 프랑스의 문명비평가 기 소르망이 '아름답고 충격적인 전위예술 작품'이라고 논평했다. 정 회장은 통일대교를 지나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 도착, 평화의 집에서 방북기자회견을 가진 뒤 도보로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이번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위해 군사분계선을 넘는다. 청와대는 아직 아이디어 차원이라며 노 대통령이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는 '연출'을 기획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소떼방북 이후 많은 정치인들의 방북이 있었지만 웬만해선 뉴스가 되지 않는다. 이는 남북간에 행해지는 일련의 행사가 이미 '보여주기'식의 '쇼'로 인식되고 있다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청와대가 이번에 기획하는 '도보방북'이 뉴스화 되는 순간부터 정치적 의도로 풀이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베를린 장벽이라는 두꺼운 벽을 허물고 하나된 조국에 살고 있는 독일 국민들에게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영웅이 있다. 나치의 잘못을 사과하며 폴란드 무명용사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던 빌리 브란트가 바로 그다. 그는 많은 반대와 비난 속에서도 서독과 동독의 교류를 지속시켜 통일독일의 기반을 닦고 유럽에 평화를 정착시킨 인물이다. 그가 폴란드 무명 용사 앞에서 무릎을 꿇은 사건은 측근조차도 몰랐던 '사건'이었다. 냉전의 팽팽한 긴장이 유럽의 동쪽을 동토로 얼어붙게 했던 당시, 브란트의 돌발행동은 분명 놀라운 사건이었지만 이를 본 유럽인들은 들뜸보다는 숙연함에 머리를 숙였다.


 '깜짝쇼'하면 내로라하는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집권기간 내내 '쇼를 한' 인물이었다. '개혁'과 '강력한 일본'을 무기로 두차례 방북, 야스쿠니 수시 참배 등 집권내내 깜짝쇼를 계속한 그를 두고 일본의 한 정치 평론가는 "고이즈미 집권자체가 일본 정치의 깜짝 쇼"라고 일침을 놓은 것은 두고두고 화제거리가 될 만하다. 우습게도 그는 자신의 돌출행동이 동아시아 외교에 걸림돌이 되자 "일한, 일중 우호에는 변함이 없다"는 궤변으로 일관했다. 정치가 다분히 쇼라는 점은 일반인들도 인정하는 대목이지만 일반인과 정치인, 그것도 최고지도자라는 자신의 역할을 망각한 채 외교와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설정하려는 그의 정치쇼는 그야말로 '쇼'로 남을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었다.


 정치가의 행동이 그 자체로 뉴스라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 북한의 김정일이다. 그는 이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정치적 행동을 스스로가 극히 제한한다. 그래서 세계의 주요 언론은 그가 공식석상에 한 달만 안보여도 '중병설'이나 '위기설'을 피워 올린다. 그런 그가 지난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대중 대통령을 공항까지 직접 나가 맞이하고 자신의 전용차에 동승한 채 평양 시내를 한 바퀴 돈 것은 분명 '쇼'였다. 그것도 철저하게 계산된 김정일식 쇼였고 우리는 아직도 그 쇼의 한 장면을 이번 노대통령 방북 때 떠올리려 하고 있다. 자신을 '베일 속의 인물'로 남기려는 김정일의 철저한 '보여주기' 정상회담에 노 대통령이 화답이라도 하듯 도보방북을 기획하는 모양은 '깜짝 쇼' 수준으로 머물 공산이 크다. 우리 국민들은 기획된 '도보 방북' 보다는 평양 시내 한복판에서 차를 내려 평양 시민들의 손을 잡고 어깨를 두드리는 우리 대통령의 모습을 더 보고 싶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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