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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공단의 건설배경에는 일제가 고사동에 건설한 조선석유주식회사 정유공장과 삼양사가 매암동에 지은 제당공장이 큰 역할을 했다. 우리 정부가 공단을 구상하기 전에 경제적으로 피폐한 우리 나라를 돕던 유엔기구가 먼저 계획을 세웠다. 유엔한국부흥단(UNKRA)은 6·25전쟁이 끝나기 직전 1953년 3월에 원조정책의 하나로 한국경제재건계획을 발표했으나, 정부는 채택하지 않았다. 1954년부터 1959년까지의 5개년 경제재건 방향과 목표를 담고 있었다. 나중에 우리 정부의 경제개발계획의 기초자료로 쓰였다.


 우리 정부가 경제개발계획을 세운 것은 자유당 정권 말기인 1959년 3월. 당시 부흥부 산하의 산업개발위원회가 1960년부터 1962년까지의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을 세웠다. 다음해 4월 15일에 국무회의에서 의결됐으나, 나흘 뒤에 터진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면서 물거품이 됐다. 제2공화국 정부는 그 계획을 바탕으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만들었다. 1961년부터 1965년까지의 계획이었다. 다음해 일어난 5·16혁명으로 군사정부가 들어서면서 시행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군사정부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만드는 기초자료로 활용했다.

 그 경제개발계획의 목표는 생산력의 극대화와 국제수지의 개선, 고용기회의 확충, 국민 생활수준의 향상, 산업구조의 현대화 등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우리 경제의 자립기반을 이루는 데에 초점이 맞춰졌던 것. 생산력의 극대화는 농어업과 축산, 광업, 제조업, 건설업 등 사회 모든 부문의 확충안을 내놓았다. 산업기반이 취약한 경제상황을 고려해서 기간산업의 경우 먼저 기계와 전기와 금속, 화학공업 등 일부 분야에 집중키로 했다. 중소기업은 노동집약적 투자를 우선키로 했다. 특히 낙후한 동력과 통신, 위생, 교육시설 등의 인프라 구축에 적극 투자해서 생활수준을 높이고, 개발의 바탕을 마련하는 것이 주안점이었다.

   
▲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이 울산 남구 장생포동 납도에서 열린 울산공업지구 설정 기공식에 참석한 시민들에게 답례하고 있다. (1962. 2. 3)

 군사정부는 쿠데타 직후인 1961년 5월 31일 기본경제정책을 발표했다. 국민경제의 균형발전을 목표로 하고, 전력과 석탄, 정유, 비료, 철강 등 기간산업의 건설에 힘을 기울인다는 내용으로 돼 있었다. 2공화국 정부의 경제개발 방안과 비슷한 내용으로 별 관심을 끌지 못했다. 7월 22일에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종합경제재건계획안을 발표하고, 8월 5일에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안을 만들기 위한 검토에 들어가는 등 개발계획안을 세우기 위한 작업에 몰두했다. 다음해 1월 13일에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국민경제의 구조적인 불균형의 시정', '기간산업의 확충과 사회간접자본의 충족', '고용의 증가와 국토의 보전 및 개발', '국제수지의 개선', '에너지 공급원의 확보', '기술의 진흥'이라는 여섯 가지 목표를 제시했다.

 정부는 기간산업단지 입지선정에 들어가 1962년 1월 27일 울산을 국내 최초의 특정공업지구로 공포했다. 정부 관계자는 뒷날 울산이 결정된 것은 <입지조건이 좋다는 것은 일제 때부터 이미 인정됐던 것이다. 즉 공업용수와 항만, 교통 등 여러 가지 조건이 우위에 있었다. 1962년 1월 4일 정부 고위층이 토의하고, 조사단을 구성해서 1월 7일부터 14일까지 다방면에 걸쳐 조사했다. 간과해서는 안될 것은 울산을 공업도시로만 고려한 것이 아니라, '문화도시'·'관광도시'로서의 발전가능성도 동시에 조사했다는 점>이라고 밝혔다. 정부가 울산을 결정한 데에는 경제인들의 건의도 큰 영향을 미쳤다. 경제인협회가 1962년 1월 10일에 공업센터의 후보지로 울산을 선정해 줄 것을 정부에 건의했던 것이다.

 울산이 공단으로 선정되기까지는 검토기간이 1개월여에 불과했다. 그렇게 빠르게 울산이 공단으로 지정될 수 있었던 것은 알려진대로 일제강점기부터 탁월한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시간적으로나 기술적,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정부로서는 짧은 시간에 더 적합한 곳을 찾을 수 없었음이다. 특히 일제가 짓다가 중단된 조선석유의 정유공장이 있었던 점은 장점이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전략사업이었던 정유공장 건설의 최적지가 울산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더욱이 일제가 매입했다가 광복으로 국유지가 된 드넓은 땅을 갖고 있었던 점도 재원이 부족한 정부에게는 커다란 매력이 아닐 수가 없었다. 울산은 그렇게 1962년 2월 3일 역사적인 공업센터 기공식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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