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화에 떠밀려 떠난 실향의 아픔 사무치는 곳
산업화에 떠밀려 떠난 실향의 아픔 사무치는 곳
  • 하주화
  • 승인 2011.05.19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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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구석구석] 3. 남구 성암동
   
▲ 울산시민들이 즐겨찾았던 남구 황성동 세죽마을 선착장에서 바라 본 처용암. (1960년대)

개운포에 구름이 걷히면
처용암을 품은 눈 시리도록 푸른 고향바다
그 바다 춘포에 동백꽃 불붙듯 피면
하얀 배꽃이 눈꽃처럼 날리고
주먹만한 배가 주렁주렁 열리던
해암, 여천, 고사, 부곡, 상개, 성암, 황성, 용연, 남화, 용암 내 고향…

'성암동'은 살아 있다. 실향민들의 가슴에서 숨쉬고 있고 애환 서린 망향탑에도 남았다. 비록 마을은 없어지고 행정동도 인근으로 편입됐지만 여전히 이주민들의 기억 속에서는 시너리대나무가 무성히 자라고 외황강에는 나룻배가 뜬다. 큰 동네 입구에 있던 주민 김현배 씨와 이장춘씨의 구멍가게가 눈에 선하고, 성암패총 일대에 자리한 이월봉씨의 방앗간과 한지골 남서쪽 산을 개간해 운영되던 이종욱씨의 목장도 선명하다.
 
#1980년 마을 이주

성암동은 울산 미포 국가산업단지 조성에 따른 환경오염 지구 이주사업으로 1980년 대 중반 마을 전체가 철거됐다. 주민들은 중구 다운동 등지로 이주했고 행정동인 선암동에 편입됐다.
 당시 성암동을 비롯해 일대에서 고향을 두고 떠나간 10개 마을의 6,000여세대·3만여명의 이주민들이 겪은 실향의 아픔은 성암근린공원 내에 조성된 '망향탑'에 알알이 남겨졌다. 
 총 16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2008년 9월10일 준공된 이탑에는 '조국 발전과 공업도시로 태어나는 울산을 위해 공해에 찌든 사랑하는 고향을 두고 떠난 그리운 얼굴들 어느 하늘 아래서 어떻게 살고 있나요'라는 글귀가 새겨졌다.
 실향민들은 오늘도 이곳에 들러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삼킨다.

   
▲ 성암동 망향탑에서 바라본 외항강.
 
#개운포성에서 유래

성암동 일대에는 조선시대 개운포성이 있었고 이때 부터 '성내' 또는 '성암'이라 불렸다. 고종 31년에 와서 '성내동'이라 했으며 행정구역 개편 때 경상남도 울산군 대현면 '성암리'로 편입됐다. 때문에 개운포성지는 성암동 성터라고도 불린다.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6호인 개운포성은 성암동 610번지 일대에 위치한다. 해변과 야산 계곡을 이용해 돌로 쌓은 성으로, 둘레가 1,264m, 면적 10만2,919㎡다.

 개운포성은 신라 때부터 왜구 방어의 요충지였으며, 조선 전기에는 수군이 머무른 뒤 한동안 폐지됐다. 그 후 세조 때 경상좌도수준절도사의 진영으로 사용되다가 조선 후기에는 배를 만드는 선소로 활용됐다. 선소는 대한제국 말까지 군함을 만들고 정박시키며 존속했고, 이를 계기로 성암동은 '선수'라 통용되기도 했다. 성은 조선 전기에 쌓은 것으로 동·서·남·북 4곳에 성문이 있었으나 동문과 북문의 형태만 남아있으며, 성벽 둘레에는 도량을 판 흔적도 있다. 특히 성터 기단 부의 돌 위에 큰 돌덩이를 세워 쌓은 특이한 축조 방식은 학술적 자료로서 가치도 큰 것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신석기 유적도 남아

성암동 일대에는 개운포 성지 뿐만 아니라 이 보다 앞선 선조들의 생활상을 짐작할 수 있는 문화 유적도 함께 분포해 있다. 451-1번지 일원에서는 신석기인들의 생활 폐기물인 조개껍데기와 짐승뼈, 물고기뼈, 석기나 토기의 파편 등이 남아있는 '패총'이 발굴됐다. 당시 덧무늬 토기, 빗살무늬 토기, 돌도끼, 그물추, 돌고래뼈, 피뿔고둥, 참굴, 떡조개 등이 함께 신석기 유물도 함께 수습됐다.
 성암패총은 보존상태가 양호해 앞으로 학술조사가 이뤄지면 이근에 위치한 황성동 '세죽패총'과 온산공업단지 내에 있는 '우봉리유적'과 함께 울산지역의 신석기 시대 문화상을 되짚어 볼 수 있는 자료가 될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또 한·중·일 3국의 문화적 교류관계도 알 수 있는 중요한 매장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산 11-1번지 일원에 위치한 '세다골 유적'에서는 삼국시대 토기의 파편이 채집됐다. 이 유적지는 세다골에 접해 있는 야트막한 구릉지로, 공장건축 등으로 인해 상당부분이 절개된 상태지만 여전히 삼국시대의 주거지와 분묘 등이 남아있을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산 123-1번지 일원 한지골유적지도 쓰레기 매립장 조성과 도로개설 등으로 인해 절개된 부분이 많은 편이지만, 무문토기와 도질토기 등이 채집되고 있어 청동기 시대와 삼국시대의 주거지가 분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외항강 낀 살기좋았던 마을

상암동은 울주군과 남구를 가로지르는 외황강이 흐르고 골짜기가 많아 어느 지역보다 수량이 풍부한 살기좋은 고장이었다.
 울주군 청량면 문수산에서 발원해 덕하에서 여러 갈래의 지류를 합류해 바다에 유입되던 외황강은 개운포성의 남쪽에 이르러서야 강폭이 넓어지고 유속이 완화되는 한편 강심도 깊어지는 만입장을 형성했다.

   
▲ 성암근린공원 내에 조성된 '망향탑'.

 여기다 갓골, 개와장 논골, 구영골, 다릿골, 도둑골, 돋칫골, 등잔골 등 마을 곳곳에는 크고 작은 골짜기가 형성돼 있었고 이를 끼고 있던 논과 밭은 농업용수가 풍부했다. 특히 배농사가 왕성했으며 배 과수원이 있던 곳곳에는 배막이 그 증거로 남아있다.
 맨안골과 우직골 사이에는 저수지가 위치해 있어 일대 5.7㏊에 이르는 논에 물을 댔다. 현재 저수지는 SK케미칼 회사 소유의 용수 비축 수조로 남아있다.

 또 외황강의 가운데 '상치미'에서 성암동의 북쪽 끝까지 이른바 '한골'이라 부르는 깊은 뱃길이 나있어 왕래도 편리했다. 한골은 개운포성을 지키던 수군들이 준설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온산읍 처용리의 도가골에서 보면 육안으로 보인다.
 또 총길이 23㎞강 곳곳에는 9군데의 나룻터가 있었고 1960년대 까지만 해도 '세죽나루터'와 온산읍 '처용리'를 오고가던 나룻배가 있었다.

 바다를 끼고 있진 않았지만 해양시설을 활용해 어족자원도 끌어왔다. 성암동 459-2번지에는 어업에 종사하거나 반농반어를 하던 극소수의 주민들이 이른방 '방배'(소형 저인망 어선)를 대던 선착장인 '석대'가 있었다. 방배는 새벽에 일찍 출항해 오후에 귀항했는데 주로 처용암 주위, 방어진 꽃바위끝, 성외마을의 노른방끝, 온산읍 범머리끝, 서생면 앞바다 등지의 연안에서 고기를 잡아왔다.
 어종은 광어, 도다리, 가자미, 아귀, 정강이, 붕장어, 고둥, 보리새우, 꼬시래기, 가오리, 복어, 쥐치, 문어, 전어, 고등어, 대구 등 계절에 따라 다양하게 잡혔다. 현재 이 곳은 지난 2002년 개운표의 가설로 옛 지형이 사라졌다.  글=하주화기자 usjh@ 사진=이창균기자 pho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