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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여름 극장가를 뜨겁게 달군 '화려한 휴가'의 상영과 함께 당시 5·18을 취재했던 외신기자들의 생생한 증언이 화제가 된 바 있다. 전 남독일 신문 기자 '게브하르트 히일셔'와 전 아시안 월스트리트저널 기자 '노먼 누트타프'가 그 주인공이다. 시체가 즐비했던 장소, 전남도청 밖 시체의 수 등 자세한 부분까지 기억하고 있는 기자들은 끔찍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날의 참상에 대해 설명했다. 지난달 27일 미얀마 민주화 시위를 취재하던 일본의 프리랜서 사진기자 나가이 겐지가 무력진압에 나선 미얀마 군경의 총탄에 맞고 쓰러지는 장면은 충격 그 자체였다. 물론 미얀마의 젊은 청년들도 희생을 당했지만 나가이씨의 죽음이 충격인 이유는 그가 미얀마사태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기자였기 때문이다.


 로이터 통신이 보도한 나가이씨의 현장 사진은 그의 투철한 '기자정신'을 생생하게 포착했다. 총탄을 맞고 바닥에 쓰러진 나가이 기자는 오른손으로 카메라를 움켜쥔 채 군인들에 쫓기는 시위대를 향해 마지막까지 셔터를 눌렀다. 죽어가면서도 현장을 놓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그의 몸짓은 사진기자가 가진 '동물적 본능'이 아니고는 이해할 수 없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투철한 기자정신은 로버트 카파로부터 시작된다. 1913년 헝가리 태생의 유대인인 그는 좌익학생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추방당해 베를린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히틀러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파리로 간 그는 사진을 팔아 돈을 벌기 위해 로버트 카파라는 이름의 가공의 미국인 사진가 행세를 하다 아예 그 이름으로 활동했다.


 카파는 스페인 내전 당시 참호에서 뛰쳐나온 병사가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지는 순간을 담은 한 장의 사진이 '라이프'지에 실리면서 전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포토 저널리즘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찬사를 받게 한 그 사진은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전쟁기록사진으로 평가되고 있다. 카파는 그 뒤 중일전쟁, 2차 대전, 중동전쟁, 인도차이나 전쟁 등 숱한 전장들을 취재하며 지금까지 모든 사진기자들에게 전쟁사진의 전설로 살아 있다. 자기희생과 위험을 무릅쓴 취재정신을 일컫는 '카파이즘'도 그 속에서 태어났지만 그도 결국 1954년 인도차이나 전쟁현장에서 지뢰를 밟아 숨졌다.


 우리나라도 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역사의 현장을 취재하다 비명에 간 기자들이 적지 않다. 1920년 일본이 간도에서 간도조선인 대학살을 지질렀을 때 동아일보 장덕준 기자가 현장에서 살육의 참상을 취재하다 일본군에게 살해됐다. 한국일보 최병우 기자는 1958년 양안대립의 현장인 금문도의 중국-타이완 격돌 현장을 취재하다 순직했다. 또 베트남전에서 종군기자로 활약한 동아일보의 백광남 기자도 1966년 전장에서 숨졌다. 하지만 최근들어 우리 언론은 위험지역 취재를 꺼리고 있다. 이 때문에 최근 아프간 한국인 피랍사태 때도 외신에 의존해서 오보를 남발하는 사태가 빚어졌지만 외신탓만 하지 우리 언론의 소극적인 보도태도를 자성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올해 들어서만 전 세계에서 40명의 기자들이 취재 도중 희생됐다. 이라크에서 가장 많은 11명이 희생됐고 필리핀에서도 기자 6명이 숨졌다. 국제사회의 분쟁은 남의 일이 아니다. 5·18 당시 외신기자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광주로 향한 것이나 양곤에서 벌어지는 미얀마 군부의 민중학살 현장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기자들의 눈은 '역사의 현장'에서 세계인에게 던지는 그들의 외침이다. 문제는 세계화 속의 우리언론은 언제나 '역사의 현장'에 존재하지 않고 그들의 '외침'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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