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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4일부터 6일까지 남구 달동문화공원에서 제41회 처용문화제가 풍성하게 개최된다. '처용, 관용과 화해로 서로 다른 세상을 만나게 하다. 세상의 모든 음악과 춤이 울산에서 어울리다'는 슬로건 처럼 올해는 '월드뮤직페스티벌'을 중심으로 처용의 가치와 의미를 전한다.
 하지만 최근 처용설화를 외설로 호도하는 주장으로 인해 처용문화제에 대한 시민들의 오해가 우려돼 몇 말씀을 전한다. 한마디로 처용설화는 외설이 아니고 예술이다.


 "아이들이 처용이 뭐냐고 묻는다면, 뭐라 답해야 할지 걱정입니다" 처용설화에 대한 외설론자들은 걱정을 태산같이 하고 있다. 하지만 걱정할 것 없다.
 "처용은 아름다운 자기 아내에게 역신이 곰보병을 퍼트리려고, 방안에 몰래 들어온 것을 보고, 춤과 노래로서 물리친 위대한 사람이란다. 처용은 춤과 노래도 잘 부르고, 시도 잘 짓고, 하여튼 용감하고 재주 있고 멋진 사나이란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말하면 되지 않는가.


 또 아이들이 역신이 뭐냐고 묻는다면, "역신은 천연두를 퍼트리는 여자 귀신이란다. 처용이 역신을 칼이나 창으로 물리치지 않고, 노래와 춤으로 감동시켰기 때문에 역신은 나쁜 마음을 고쳐 먹었단다. 그래서 처용 앞에 사람 모습으로 나타나 꿇어 앉아 빌면서 말했단다. 다시는 처용의 얼굴을 그린 그림만 봐도 침범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그래서 이 할아버지가 어렸을 땐, 설날엔 처용의 얼굴을 그린 그림을 걸어놓고 모든 질병을 막고 건강하고 편안하게 살도록 빌었단다"


 그러면 아이들은 처용에 대한 상상력에 골몰할 것이다.
 울산시인인 권주열씨가 최근 처용설화를 외설로 보는 시각에 대해 일침하는 답을 내놓은 바 있다.
 "바야흐로 지금은 '문화'다. '상상력과 문화'의 시대다. 굳이 명 영화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를 예로 들지 않아도, 예술의 기능이 우리사회 전반에 얼마나 막대한 파급효과를 가져오는지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더욱 처용이 필요할 때다. 설화 '처용'이 우리의 상상력을 통과할 때만이 제대로 된 '문화' 제대로 된 '축제'가 크로스 된다" 그렇다. 상상력은 인류의 발전을 가져온 힘이다.


 혹자는 처용가에 '가랭이'란 말이 나오기 때문에 그것이 외설이라서, 처용이라는 이름을 지워야 한다고 역설한다.
 처용가는 신라 49대 헌강왕 3년에 생긴 것이다. 천여년 전에 무슨 우리말을 표기하는 문자가 있었기에 '가랭이' 운운하는가?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셨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 아닌가.


 신라때는 한글이 없었다. 한자만 있었다. 그래서 신라 향가는 한자의 訓(훈)과 音(음)을 사용하여 우리말을 표기했던 것이다. 처용가의 텍스트는 이러하다.
 '東京明期月良 夜入伊遊行如可// 入良沙寢矣見昆 脚烏伊四是良羅// 二隱吾下於叱古 二隱誰支下焉古// 本矣吾下是如馬於隱 奪叱良乙何如爲理古'
 脚(다리각)烏(까마귀오)伊(저이)는 '다리가'이며, 伊는 발어사(發語辭)로서 '저' 또는 '어허'란 뜻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리가 네 개'라는 것은 사람이 두 사람이란 뜻을 은유로 표현한 것이다. 얼마나 멋진 은유이며, 완곡한 표현인가. 그러나 정작 외설의 문제는 처용가를 양주동박사보다 먼저 연구했던 일본학자 小蒼進平(소창진평)이 '本矣'를 밑이라고 해석하여 무슨 성기 표현같이 해석한 것이 문제인데, 이것은 양주동 박사가 '본디' 또는 '본래'로 바로 잡아주었다. 그리고 역시 일본학자 '金澤庄三郞(김택장삼랑)' 같은 학자는 '吾下'를 '내밑'이라고 해석하여 이것 역시 성기를 표현한 것 같이 해석하였다. '吾下'는 '내해'란 뜻이다.  우리 경상도 지방엔 신라 때 고어가 많이 남아 있다. 아직도 안동지방엔 '나의 것'을 '내해'라고 말한다. 일본의 두 학자는 은연중에 신라의 향가를 천박한 것처럼 폄하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찬란한 신라의 문화야말로 그들에겐 자존심 상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처용가를 외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게 일본학자의 해석을 따르는 우미가 아닌가 생각된다. 말하자면 친일적 사고, 친일적 뿌리가 그들의 뇌리속에 독버섯처럼 돋아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처용가는 고려조에 익제 이제현, 도은 이숭인 등의 명현들에 의해 名詩를 남기게 되었고, 처용공을 찬양하는 시가 만인에게 회자되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시고, 비로소 성현이 '악학궤범'에 우리 한글로 된 처용가사를 자랑스럽게 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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