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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유물에 대한 집착은 개인의 유전인자 속에 녹아 있는 뿌리의식 때문이다. 히틀러가 그렇다. 어린시절부터 사진이나 미술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던 그는 예술에 대한 동경이 남달랐지만 언제나 주류에 편입하지 못한 삼류였다. 한 차원 높은 예술을 동경하면서도 그 동경의 대상이 주류였고, 그 주류의 틈에 자신이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그는 돌변했다. 그러한 히틀러의 왜곡된 사고는 그의 저서 '나의 투쟁' 곳곳에 잘 나타난다. 당시 예술계의 주류였던 인상파, 입체파, 미래주의, 다다이즘 같은 현대미술 사조들은 히틀러 앞에서 "타락한 정신의 산물" 로 평가절하 됐다.
 히틀러의 이야기를 서두에 꺼낸 것은 그의 광적인 과거 예술품 수집 때문이다. 전쟁을 준비 중인 히틀러는 저명한 미술사가이며 제3제국의 박물관장 오토 큄멜에게 16세기 이후 독일에서 탈취되어 전 세계에 흩어진 독일 미술품들을 본국으로 송환시킨다는 계획 하에 보고서를 작성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이른바 큄멜 보고서를 근거로 히틀러는 프랑스에 1,800점의 예술품 반환을 요구했다. 표면상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이 요구는 결국 프랑스 점령의 명분이 된 셈이다.

 과거의 기록이나 기념물, 예술품을 찾아내고 이를 정리하는 작업은 국가를 세우는 일만큼 중요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히틀러는 이같은 작업을 국가재건과 민족의 응집력을 구축하는데 철저히 이용한 인물이었다. 히틀러가 박물관을 만들었다면 아마도 거대한 게르만민족사관이 베를린 한켠에 웅장하게 들어섰을 것이라는 짐작도 이 때문에 가능하다. 비록 히틀러가 그의 계획대로 웅대한 박물관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그의 광적인 유물수집은 루브르나 대영박물관을 한바퀴 돌면 그 이유가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히틀러 뿐만이 아니라 세계사의 수많은 정치지도자들은 자신의 민족이 이룩한 과거의 족적을 한곳에 담아내길 원했다. 영국과 프랑스처럼 제국주의 시대, 세계를 한손에 거머쥐고 싶어하던 지도자들이 자신의 민족을 넘어 온 인류의 흔적을 자신들의 영역 안에 담아두려한 것도 그런 욕망과 동실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박물관은 살아 있다. 죽은 영혼과 육신이 진흙과 돌덩이, 그리고 금속과 안료에 뒤섞여 때로는 욕망으로 때로는 용서로 낮고도 높게 자릴 잡고 있지만 그 박물관 속 과거는 언제나 그들의 시대, 그들의 욕망과 절제를 노래하고 있다.

 바로 그 박물관이 울산에도 우뚝 섰다. 한반도 동남쪽 끝, 귀신고래 바로 돌아 북녘 얼음바다로 머리 향하는 이 땅이 오래고 먼 과거의 역사를 품고 있음을 번듯하게 알릴 공간이 생긴 셈이다. 박물관은 애초에 전시의 공간이 아니라 학문을 논하던 공간이었다. 박물관은 BC 300년경 이집트 시대에 알렉산드리아 궁전 무세이온(Museion)이 그 기원이다. 예술의 여신 뮤즈를 위해 마련한 이 공간에서 이집트인들은 과거의 유물을 옮겨 옛사람들의 지혜와 그들의 예술 세계를 공부했다. 그들이 과거를 배우려고 한 것은 스스로에 대한 정체성을 찾기 위한 작업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과거를 통해 내일의 방향을 읽으려는 시도였다.
 그렇다. 박물관은 죽은 영혼과 죽어 있는 물상을 안치하는 장소가 아니라 살아 있는 자들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공간이다. 파리에 가면 루브르박물관을 찾고 히드로 공항에 내리면 지도에서 대영박물관부터 찾아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들의 과거는 인류의 지난 날이자 먼 옛날 우리 조상과 연결된 삶의 방식과 소통하기에 우리는 그들의 박물관에 기꺼이 비싼 입장료를 지불하는지도 모른다.

 울산도 이제 박물관 시대가 열렸다. 굴뚝 도시 울산에 박물관이 들어섰으니 굴뚝의 역사가 즐비하리라는 상상을 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 이들에게는 산업사관이 흡족한 기쁨을 느끼게 하겠지만 원컨대 산업사관 둘러 본 뒤 역사관으로 발길을 옮길 때는 청심환 하나쯤 삼켜주길 바란다. 울산은 미안하지만 한반도 인류의 시원이 깃든 땅이다. 한반도의 동남쪽에 위치한 울산은 예로부터 사람이 살기 좋은 터전이 되어 우리의 선인들이 아득한 원시시대부터 육로나 해로를 따라 들어와 정착사회를 이루어 살았던 곳이다. 거짓말처럼 들리는 이 이야기는 울산박물관에 가면 확인할 수 있다. 서생면 신암리 유적이나, 장현동 황방산의 신석기 유적이 있고 석검이 출토된 화봉동과 지석묘가 있는 언양면 서부리의 청동기 유적이 있다. 어디 그 뿐인가. 한반도 선사문화 일번지인 대곡천 일대의 암각화는 울산이 고대 한반도 정착민의 영험한 영역이었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울산은 천혜의 땅이다. 그 천혜의 땅에서 일궈낸 문화의 힘이 고대국가와 신라, 고려와 조선을 지나 오늘에 연결돼 있다. 그 오랜 역사의 끝자락이 산업수도 울산이지만 오래된 과거는 울산을 그렇게 설명하지 않는다. 바로 그 뿌리의 학습장, 울산에 대한 문화적 충격의 공명장으로 울산박물관이 자리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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