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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정유공장 초기의 저장탱크가 설치되어 있는 남구 용잠동 일대. 강 건너가 장생포이다. (1967년 4월)

울산공단은 현재 자동차와 조선, 석유화학이 세 축(軸)을 이루면서 세계적인 공단으로 날갯짓을 하고 있다. 정부의 처음 계획은 우리 나라 경제발전의 전략업종인 정유와 비료, 제철공장이 세 축을 이루는 것이었다. 공단개발 초기에 터진 국제적인 석유파동 등으로 재원마련에 큰 어려움이 닥쳐 결국 제철공장은 건설되지 못했다.

 울산공단 최초로 지어진 공장은 정유공장이었다. 일제가 건설한 조선석유 울산공장의 일부 시설과 부지가 있었기 때문에 개발초기에 완공돼 가동에 들어갈 수 있었다. 당시 에너지 확보는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울산공단 기공식을 마친 7개월 뒤 1962년 9월에 부지정리공사를 했다. 그리고 63년 3월 공장 건설공사에 들어갔다.

 옛 조선석유 울산공장 터 15만평을 중심으로 한 40만평의 부지에 1일 3만배럴 생산능력의 공장을 짓기로 한 것. 건설자금 가운데 35억은 내자(內資)로 충당했지만, 부족자금은 미국 걸프사(社)와 합작을 통해 1,600만 달러를 마련했다. 기술과 원유도 제공받기로 했다. 착공 그 해 63년 12월에 준공하고 시운전을 거쳐, 다음해 1964년 4월 1일 가동을 시작했다. 공단 개발에 착수한지 불과 2년여만에 첫 공장이 준공돼 가동에 들어갔다. 대한석유공사 울산정유공장이 탄생했다. 그 뒤 67년과 68년, 70년, 72년 제2차 경제개발기간 네 차례에 걸쳐 110만평으로 늘어났다.

 정유공장의 가동은 우리 나라 경제발전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그야말로 감격적인 대사건이었다. 울산공단의 핵심시설인 정유공장이 가동됨으로써 관련 산업체의 건설을 더욱 촉발함은 물론 기업 지원시설도 잇따라 들어서게 됐다.

 정부가 울산공단의 또 하나 핵심공장으로 계획한 비료공장은 기존 충주와 나주의 요소비료공장으로는 국내 수요를 충족시키는 데에 턱없이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전체 수요의 30%에도 미치지 못해 해마다 5,000만 달러 이상의 비료를 수입해야 했다. 울산공단에 연간 질소비료 8만5,000곘 생산능력의 복합비료공장을 건설하기로 했다.

 울산공단을 계획한 1962년 당초에는 장생포항 안쪽인 정유공장 건너편의 35만평에 짓기로 했다. 암석지대인데다 수심이 4m에 불과해 배가 들어오는 데에 어려움이 많아 불가능했다. 여천동 일대로 옮길 수 밖에 없었다. 삼성그룹이 맡아 1964년 8월 한국비료가 설립됐다. 65년 12월 여천동 일대 35만평에 공장건설 공사에 들어가 67년 4월 준공됐다. 공장을 짓는 과정에서 사카린 밀수사건이 터져 공장은 국가 소유로 넘어갔다. 1994년에 삼성 측이 인수해서 삼성정밀화학으로 회사 이름이 바뀌었다.

 정부는 한국비료의 건설과 같은 시기에 국영의 제3비료공장 건설에 들어갔다. 1964년 5월 미국 측과 비료공장 건설운영을 위한 협약을 체결했다. 건설자금 3,400만 달러는 민간차관으로 충당키로 했다. 다음해 65년 8월에 영남화학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미국 후로아사(社)와 공장건설을 계약했다. 65년 12월에 여천동과 매암동 일대 30만평에 공사에 들어가, 1년 3개월여 뒤 67년 3월에 준공했다.

 여천동과 매암동에 기업체가 잇따라 들어섰다. 한국알미늄이 66년 8월 여천동 18만평에 착공해 69년 7월 준공됐다. 동양나일론은 65년 매암동 12만평에 착공해서 68년 7월 완공했다. 공영화학이 66년 10월 야음동에 착공해 67년 9월 준공됐으며, 그 밖에도 동양합섬과 한국석유, 인성산업 등 10여개의 기업체가 공단개발 초기에 들어섰다. 비료공장을 비롯한 이들 기업체의 부지에는 국유지인 일제 때의 동양척식이 조성한 공장용지 또는 매입용지가 상당수에 달해 공장건설에 많은 도움이 됐다.

 한편 산업용과 민간용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6만6000Kw의 화력발전소도 세워졌다. 영남화력발전소가 67년 3월 남화동에 착공해서 67년 8월 1호부터 4호기까지를 준공·가동했다. 68년 8월에 5호부터 10호기까지를 준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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