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울산공업단지의 상징이다. 모든 국민이 공장의 화려함에 희망을 걸었다. 한국 근대화의 가능성과 성공을 의미하는 공업단지 야경장면이다.

울산공단은 제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끝난 1981년에 대규모 공단으로 성장했다. 1962년부터 1981년까지 20년간 시행된 4차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울산공단은 62년에 불과 42개 소규모 공장만 가동되고 있었으나, 81년에는 무려 12.2배가 늘어난 514개의 업체가 입주해서 우리 나라 경제의 핵심기지로 자리잡았다.

 공업센터로 지정된 1962년에 울산의 산업구조는 전체 인구 8만5,082명 가운데 취업인구는 3만2,793명으로 나타났다. 1차산업 종사자는 71.4%인 2만3,428명, 2차산업 종사자는 4%인 1,312명, 3차산업 종사자는 18.4%인 6,012명이었다. 농수산업 중심의 산업구조를 가진 전형적인 지방소도시에 불과했다.

 그 뒤 가속화된 공업화로 1차산업 구조는 현저하게 떨어지고, 2차산업은 급격하게 높아졌다. 8년 뒤 70년에는 전체 인구 15만9,340명 가운데 취업인구는 62년보다 1만5,340명이 늘어난 4만8,133명이었다. 1차산업 종사자는 1만4,107명으로 62년의 71.4%에서 29.3%로 크게 줄었다. 반면 2차산업 종사자는 34.5%인 1만6,608명, 3차산업 종사자가 가장 높은 38.2%인 1만7,418명이었다.

 80년대부터는 대기업체가 속속 가동되면서 2차산업 종사자의 비율이 높아졌다. 80년에 전체 인구 46만9,287명 가운데 취업인구는 14만9,268명이었다. 1차산업 종사자는 3만1,650명으로 21.2%, 2차산업 7만3661명으로 49.4%, 3차산업 4만3,957명으로 29.4%였다. 이 같은 산업구조의 변화는 중화학공단이라는 특성상 대기업이 입지함에 따라 관련 중소기업도 뒤따라 입주함으로서 이뤄진 것이다.

 18년 사이에 공업분야 종사자는 60배, 공장수는 3.4배, 단위공장당 평균 종업원수는 17명에서 465명으로 늘었다. 특히 200명 이상의 종업원을 가진 대기업수는 41개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종업원수는 6만명을 넘었다. 반면 100명 미만의 중소기업체는 대기업체의 배가 넘는 83개였지만, 종업원수는 3300여명에 불과했다.

 울산공단 개발에 투입된 정부의 투자액은 1차 경제개발 기간(1962-1966년)에는 첫 해인 62년에 9억3,500만원을 투입되는 등 모두 403억5,700만원이 들었다. 2차 기간(67-71년)에는 841억3,600만원, 3차 기간(72-76년)에는 6,055억원, 4차 기간(77-81에는 공장부지 조성이 거의 끝난 상태여서 공단건설에는 대규모 투자는 이뤄지지 않았다.

 울산공단의 경제성과를 나타내는 데에는 수출액이 가장 좋은 척도가 될 수 있다. 공단 지정 당시 1962년의 울산의 수출액이라야 활선어와 어육, 한천을 중심으로 26만 달러에 불과했다. 1차 경제개발 기간의 마지막 해인 1966년의 수출액이 62년의 30배인 766만 달러였다. 2차 기간 첫 해인 67년에는 1천만 달러를 돌파한 1,378만 달러, 2차 기간이 끝난 71년에는 2,439만 달러였다.

   3차 기간에는 수출액이 크게 늘어났다. 대기업체가 잇따라 들어서고, 정부의 수출 드라이부 정책이 본격적으로 시행된 때문. 3차 기간 첫 해인 72년에 6,030만 달러에서 출발해, 73년에는 1억 달러를 넘지 못한 8,070만 달러에 그쳤다. 74년에는 크게 늘어나 3억2,230만 달러를 기록했으며, 76년에는 7억750만 달러를 나타냈다. 76년의 수출액은 전국 대비 9.1%.

 4차 기간(77-81년)에는 석유화학 업종의 집적이 완료되고, 자동차와 조선업체의 확장 등으로 전국 수출액의 10%를 넘어서는 등 10억 달러를 돌파했다. 77년에 10억 달러를 넘은 11억5,880만 달러를 나타냈다. 78년에 13억4,060만 달러를 기록했으나, 79년에는 정치적인 혼란 등으로 11억7,500만 달러로 줄었다. 80년에는 16억9,900만 달러를 기록했으며, 81년에는 20억 달러를 넘은 23억2,200만 달러를 기록해 전국의 10.9%를 차지했다. 이후 4차 기간에 본격적으로 개발된 비철금속 제련기지인 온산공단과 조화를 이루며 울산공단이 명실상부한 세계 속의 공단으로 정착하게 된 것이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