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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은사지의 동탑.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는 문무대왕릉

시작은 경주시 감포읍 봉길리의 문무대왕릉입니다. 울산 도심에서 정자 쪽으로 시원하게 뚫린 국도 35호선을 따라 30분 남짓이면 닿을 수 있는 곳입니다. 월성원전을 우회하는 고갯길이 끝나는 지점에 있는 봉길 해수욕장 앞바다에 있는 신라 제30대 문무왕의 수중릉인 대왕암.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겠다고 동해에 묻어 달라 했던 문무왕의 호국정신이 깃든 곳입니다.

 여름 봉길 해변은 피서객들과 갈매기들이 공존하는 놀이터입니다. 깨끗한 바닷물에 '풍덩' 빠져버린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가끔씩 해변으로 올라오는 멸치 떼들을 노리는 갈매기들의 소리가 한 여름의 무더위를 식히고 있습니다. 이 해변에서 200m 들어간 곳에 집채만 한 화강암 바위가 모여 있는 곳이 문무대왕 수중릉입니다. 세계사에 유례없는 황갈색의 수중왕릉은 오랜 세월 거친 물살을 잘도 버티고 있습니다.

 문무대왕은 삼국을 통일한 왕입니다. 문무왕은 아버지인 태종 무열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한 후, 우리 영토에 야심을 드러낸 당나라군을 내쫓았습니다. 하지만 동해로 침입하여 백성들을 괴롭히는 왜구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습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문무왕은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나는 세간의 영화를 싫어한지 오래이며 죽은 후에는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키겠소"라고 말합니다. 문무대왕이 죽은 후 아들 신문왕은 부왕의 유언을 받들어 동해 이곳 봉길 앞바다에 수중릉을 만듭니다.

 수증릉의 수면 아래에는 길이 3.7m, 폭 2.06m의 남북으로 길게 놓인 넓적한 거북모양의 돌이 덮여 있다고 합니다. 아마 이 안에 문무왕의 유골이 매장돼 있을 것이라 추측되고 있습니다. 사방으로 마련된 수로와 아울러 안쪽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바위를 인위적으로 파낸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기록에 나타난 것처럼 문무왕의 수중릉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 지난 1970년 건물터가 발견돼 복원된 이견대.


#만파식적의 전설 깃든 이견대


봉길 해변에서 감포쪽으로 조금만 이동하면 수중릉을 조망할 수 있는 정자가 있는데 이곳이 만파식적의 '이견대(利見臺)'입니다.
 신문왕은 봉길 앞바다에 있는 부왕의 수중릉을 망배(望拜)하기 위해 이견대를 짓습니다. 이견대란 주역(周易)의 '비룡재천 이견대인(飛龍在千利見大人)'에서 나온 것입니다. 지난 1970년 그 건물터를 발견하여 새로 누각을 짓고 이견대라는 현판을 걸었다고 합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문왕은 이 곳 이견대에서 죽은 문무왕의 화신(化身)이라는 용을 보았다고 전합니다. 또 이견대는 '만파식적(萬波息笛)' 설화를 간직하고 있는 곳입니다.

 신문왕이 이견대(利見臺)에 들렀는데 이 때 해룡(海龍)이 나타나 흑옥대(黑玉帶)를 바쳤고, 해룡의 말에 따라 바닷가에 떠 있는 산 위의 대나무를 잘라 피리를 만들어 월성(月城)의 천존고(天尊庫)에 소중히 보관했는데 그 뒤 적군이 쳐들어오거나 병이 났을 때, 또는 큰 가뭄이 들거나 홍수 및 태풍이 불었을 때, 이 대나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낫는 등 모든 일이 평정되었으니 이 피리를'만파식적'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진짜 문무대왕이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나타난 것일까요.

   
▲ 기림사 대적광전 앞 마당의 삼층석탑.
#효의 결정체 감은사

이견대에서 다시 돌아 나와 대종천을 따라 경주 쪽으로 가면 그야말로 신라왕의 길이 나옵니다. 서쪽으로 쭉 뻗은 신작로 같은 길. '나의 문화유선답사기'를 쓴 유흥준은 이 길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고 했습니다. 아마 수많은 왕들이 경주 도읍에서 덕동못과 추령을 거쳐 이길을 따라 문무대왕릉 참배에 나섰을 것입니다. 길 양쪽으로 호위병처럼 서 있던 가로수들이 '사고위험' 때문에 제거되어 전봇대만 남은 초라한 몰골로 남았지만, 대종천을 끼고 곧게 뻗은 길은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대종천. 바닷물이 들었던 이곳에는 왜구들의 침입이 잦았습니다. 어느 날 왜구들이 토함산 골짜기의 커다란 종을 훔쳐서 달아나려다가 대종천에 이르러 풍랑이 심하게 일어서 그만 종을 빠트리고 맙니다. 그때부터 이 곳 내를 대종천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토함산에서 발원한 이 대종천이 막 끝나는 곳 북쪽 언덕에 두 개의 석탑이 정답게 서 있습니다. 바로 감은사지 석탑입니다. 최근까지 복원과 보수 작업을 위해 가림 막을 쳐 놓았지만 지금은 작업을 마무리하고 온전한 모습으로 당당히 서 있습니다.

 감은사의 시작은 '진호국사'를 줄인 말인 '진국사'였다고 합니다. 아버지 문무왕이 왜를 진압한다는 뜻 '진국사'를 짓다가 죽은 후에 아들 신문왕은 아버지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의 '감은사'로 이름을 바꾼 것입니다. 가람은 부왕을 향한 신문왕의 절절한 효심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가람터 금당 바닥에는 바닷물이 들어올 수 있도록 용혈을 파 두었습니다. 용이 된 부왕이 이 용혈을 통해 들어 왔다 나갔다 할 수 있게 배려한 것입니다. 가람터 앞, 지금은 연꽃이 만발한 연못은 옛날 선착장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배를 묶어 두기 위한 시설이 있습니다. 대종천은 지금은 말라 버렸지만 그리 멀지 않은 옛날에는 이 곳 감은사지에 오르려면 배를 타고 들어 와야 했다고 합니다. 신라시대 이 용혈을 통해 바닷물이 금당을 들락거렸을 게 분명해 보입니다.

 감은사지 3층 석탑은 언제 보아도 힘이 있고 당당합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자신감이 곳곳에 배어 있습니다.
 감은사지는 지금 개망초 꽃과 토끼풀이 한창입니다. 하얗게 오른 개망초 꽃 사이로 탑을 보면 신비감이 더합니다.

#의연히 일어선 승군의 중심 기림사

서쪽으로 기운 해를 따라 기림사로 갑니다. 신문왕이 문무대왕릉으로 행차할 때 마다 들러 서쪽 계곡에서 점심을 들었다는 천년고찰입니다. 기림사는 643년(선덕여왕 12) 천축국(天竺國)의 승려 광유(光有)가 창건하여 임정사(林井寺)라 부르던 것을, 뒤에 원효가 중창하여 머물면서 기림사로 불렀다고 전해집니다. 조선시대에는 월성군 일대를 관장하던 큰 절이었지만 지금은 불국사에 그 자리를 내주고 말사의 위치에 있습니다.

 숲길을 지나 산문을 들어서면 대적광전(大寂光殿)을 중심으로 왼쪽에 약사전, 오른쪽에 응진전(應眞殿), 앞쪽에 진남루가 사각의 성지를 이루고 있고, 뜰에는 삼층석탑과 새로 조성한 석등이 있습니다. 진남루는 조선시대 때 승군 지휘소로 사용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풍전등화에 놓인 나라를 위해 분연히 일어난 승병들의 의기에 찬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진남루 앞으로 한 무리의 청소년들이 모여 있습니다. 방학을 맞아 '사찰체험'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궁금한 것이 얼마나 많은 지 안내를 맡은 스님이 진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여름 땡볕을 피해 나무 그늘에 않아 진남루 앞 마당의 삼층석탑을 봅니다. 그리고 다시 문무대왕릉으로 향하는 신문왕의 긴 행렬을 상상해 봅니다. '신라왕의 길'은 기림사를 되돌아나온 후 토함산 추령재를 넘어 덕동못을 지나 도성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왜구의 침략에 노출된 백성들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는 신라왕의 당당한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며칠 후가 일제의 강점에서 벗어난 66주년 광복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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