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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35년 전인 1976년 여름방학, 로보트 태권브이가 한반도 상공을 날아올랐다. 날아라 날아 로보트야, 달려라 달려 태권브이…. 그해 여름 태권브이는 대단했다. 김일성이 남쪽을 향해 총부리를 들이대지 못하는 이유가 얼룩무늬 군복을 입고 매일 출퇴근 하는 도시군인(방위)들의 도시락 때문이라는 우스개 소리가 유효하던 시절, 로봇 태권브이가 힘차게 하늘을 나는 그림은 그야말로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했다. 그 이듬해, 이번에는 철갑을 벗어던진 생얼 태권남매가 한반도 산하를 쩌렁쩌렁 울렸다. 마루치 아라치. 동작 하나마다 음양의 기가 농축된 남매의 발차기는 악을 소탕하고 이 땅의 정의와 평화를 지켰다.
 그 시절, TV를 켜면 저녁식사 시간대는 무조건 만화프로그램이 안방극장의 주인공이었다. 황금박쥐나 아톰, 마징가Z에 짱가까지, 저녁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심취한 만화 때문에 어머니의 꾸중을 들은 기억이 지금 40대 이상 세대에겐 추억처럼 남아 있다. 그 당시엔 몰랐지만 어쩌랴, 그들이 즐겼던 그 만화 모두가 일본방송이 제작한 일본산 만화였다. 하긴 원산지 표시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말 주제가가 신났던 시절이니, 보고 즐기던 어린이들은 그저 악당의 무리를 쳐부수는 우리의 로봇들이 승리하면 그뿐이었다.

 그 많던 TV 만화들은 어디로 갔을까. 우리의 태권브이와 마루치 아라치는 어디에 숨었을까. 달려라 하니는 여전히 달리고 있는 걸까. 문득 그 시절, 만화로 배운 선과 악의 세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그래, 어느 순간부터 우리의 TV에서 만화가 사라졌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지상파에서 사라져 만화전문채널로 옷을 갈아 입었다. 어디 옷만 갈아 입었을까. 어느날 문득, 만화가 그리워 채널을 돌리면 화들짝 낯빛이 붉어진다. 우리의 하니는 요상스런 옷을 걸쳤고 청순 소녀 캔디도 화장을 했다. 여자 주인공은 한결같이 초미니를 걸친 채 아슬아슬한 노출수위에 턱걸이를 하고 폭력과 납치, 성폭행은 물론 심지어 경찰을 찔러 죽이는 장면도 스스럼없이 펼쳐진다.
 우리 만화는 물론 아니다. 거의 대부분이 일본만화에 우리말 자막처리와 더빙을 한 경우이니 황금박쥐 시대와 달라진 것은 없다. 다만 스토리 자체가 변했다. 세일러문, 다간, 천사소녀 네티, 포켓몬 시리즈까지만 해도 원산지가 어디든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것으로 충분했으니 굳이 원산지 타령을 하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우리의 이야기를 우리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는 없는 것일까. 7세 이상 관람이 가능한 캐이블의 만화 채널은 부모의 관리 아래 있으니 괜찮다고 안심해도 되는 것일까. 꼬리를 무는 걱정이 문득 섬뜩한 절망감으로 내 뒤통수를 후려친다.

 우리 만화도 한때는 잘나갔다. 일본 만화의 홍수에 국산만화를 만들어보려는 노력은 태권브이 이후 꾸준히 힘이 실렸다. 그 결과 1987년에는 떠돌이 까치가, 1989년에는 달려라 하니가 KBS 전파를 타고 그때 우리 어린이들을 움켜쥐었다. 이후 아기공룡 둘리, 날아라 슈퍼보드, 머털도사 등 셀 수 없는 만화시리즈는 교과서에서 채울 수 없는, 갈등과 불합리의 현실 속에 꿋꿋하게 일어서려는 주인공의 의지를 아이들에게 심어줬다.
 아마도 그것이 마지막이었지 싶다. 1990년대 이후 민영방송이 개국하면서 우리의 만화시장은 완전히 상업화됐다. 1991년 12월 SBS 개국과 동시에 들고 나온 슈퍼 그랑죠 이후 만화는 시청률 경쟁의 도구가 됐고, 우리 만화는 자리를 잃고 또다시 일본 만화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리고 다시 세월이 흘러 만화는 늦은 밤 부모 몰래 캐이블 채널에서 만나는 야릇한 볼거리로 전락해버렸다. 더 이상 태권브이는 정의의 눈빛을 띠지 않는다. 그 누구도 엄마 없는 하니에게 용기를 북돋아주지 않는다. 시청률 효율성이 떨어지는 정의와 희망의 코드는 이제 지상파의 만화프로로 매력이 없게 됐다. 하지만 어쩌랴, 우리는 여전히 태권브이가 창공을 날아올라 악의 무리를 무찌르는 유쾌한 상상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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