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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 남목 관문관으로 울산과 인연을 맺었던 홍세태가 남긴 작품에 등장하는 마골산 동축사 전경.

 오랑캐 아이들이 다투어 시를 얻으려 했기에
 종이 한 장 비단 한 조각도 귀하게 여겼었지.
 중국 시장에까지 흘러 전해져서 
 판에다 새긴 것과 한가지였네.
 수백 년 지나는 동안
 그 누가 이를 따라가랴.
 여러 시인들도 모두 다
 그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할 텐데.

홍세태(洪世泰)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에게 시를 배운 제자 완암(浣巖) 정내교(鄭來僑)가 지은 '유하 옹의 죽음을 슬퍼하며[柳下翁挽]'란 시(詩)다.홍세태의 시재는 탁월했다. 비록 중인이라는 신분적인 제약으로 삶은 고달팠지만, 타고난 글솜씨는 따라 올 자가 없었다. 당대의 명사 6창(昌) 가운데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과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이 그의 솜씨와 성품에 감복해서 교유했다. "그대야말로 마음대로 지껄여도 글이 되는 사람"이라고 극찬했다. 홍세태의 시의 경지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조선후기 중인문학 거목

홍세태는 울산의 남목(南牧) 감목관(監牧官)에 있으면서 200여편의 시를 남겼다. 울산에서 벼슬살이를 한 관리 중에 그만큼 울산의 풍물과 주민 삶의 모습을 많은 시와 문장으로 남긴 사람은 없다. 그의 문집에 실려 전하는 시가 1620여 수인 점으로 감안하면 짧은 울산 생활에 그만큼 많은 시를 남겼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관리되어 관아를 집으로 삼으니/ 쓸쓸한 관아에서 일찍 일을 마치네./ 작은 재주 믿고 세월을 보냈더니/ 임금의 은혜는 오히려 고기와 새우를 먹게 하시네./ 낮잠 자는 숲 속에는 새소리 옮겨다니고/ 가을 정취 담장 아래엔 국화꽃 만발하네./ 밖을 보니 산과 바다 푸른빛이 가득한데/ 문득 깨달으니 이 몸은 하늘 끝에 와 있다네." 동구 남목동에 있었던 '남옥(南玉)목관'을 그린 시다. 동구문화원이 지난해 10월 펴낸 '홍세태가 본 조선 후기 울산의 모습(이정한 번역)'에 실려 있다.

그 책에는 홍세태의 시를 여섯 갈래로 나눴다. 감목관 벼슬길을 오가며 쓴 것과 울산의 목장과 관련된 것, 조선 후기에 지금의 동구지역의 모습과 풍속에 관련된 것, 울산의 주변지역을 다니며 쓴 것, 가족과의 이별과 외로움을 주제로 쓴 것, 기타 서정시로 돼 있다. 저녁 무렵 남옥목관에서 느낀 심사를 적은 '저녁 무렵의 관아[在坰軒夕坐]'란 시는 다음과 같다. "바닷가에 비 내리니 등불도 침침한데/ 높은 파도 밤이 되면 누각을 뒤흔드네./ 푸르고 넓은 바다 만리가 한빛인데/ 황홀한 빛 바라보니 온갖 생각 근심이네./ 나는 언제나 말을 타고 가고픈데/ 관사 곁엔 도리어 배를 가까이하네./ 가난한 저 어부들 고기 적게 잡았는데/ 맛난 밥상 차렸는지 물을 수도 없네."

신분제약 굴레에 대한 분노 표출

홍세태는 문운(文運)이 크게 일어나기 시작한 조선 후기 숙종 연간을 살다갔다. 위항문학(委巷文學)이 일어나던 때였다. 위항문학은 사대부문학 또는 양반문학과 대립적으로 쓰인 말이다.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사대부문학이 주류를 이뤘으나, 임란을 전후하여 사대부가 아닌 지식인-중인이나 평민-이 늘어나고, 그들이 한시를 지으면서부터 위항문학 시대가 시작됐다. 초기에는 조직적인 운동으로 발전하리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세력이 커지자, 사대부 계층에서도 그 존재를 인정하게 됐다.

홍세태는 위항문학인 가운데에서도 단연 발군의 존재였다. 위항문학을 이끄는 선도자로 자리를 잡았다. 한 가지 경향의 시만 고집하지 않았다. 풍부한 감수성을 엿볼 수 있는 서정시를 지었다. "한가롭게 연못가에서 팔 베고 잠드노라니,/ 맑은 물결에 그림자 져 물밑에 하늘이 있네./ 한낮 겨운 버드나무 바람이 얼굴을 간지르며 불어오고,/ 푸른 산도 내 앞으로 더 가까이 다가섰네." '연못가에서[池上漫興]'란 시다. 고요한 한낮에 자연의 모습을 기교를 부리지 않고 스케치하듯 그려낸 솜씨가 일품이다. 서경시(敍景詩)의 진경을 본다.

관리의 횡포와 피폐한 농촌을 등지고 유리걸식하는 백성들의 참상을 그린 시도 썼다. 지식인으로서의 본분을 결코 잊지 않았다. "관가에서 해마다 군대 채울 걸 재촉해/ 상사의 명령서는 질풍같이 집행하네./ 고을이 작아서 충당할 백성은 없건만/ 군대 오라는 문서는 잇달아 날아드네./ 시아버지는 어린 아기를 강보에 싸들고/ 아전 향해 눈물만 흘리며 울음 삼키네./ 아아, 강보에 있다고 하소연하지 마소,/ 뱃속에 있을 적부터 이름 지어 올렸다오./ 교활한 아전들 권력 쥐었다고 돈이나 탐내니/ 동쪽 마을 조용하면 서쪽이 경칠 때라네." '병사를 뽑는다면서[抄丁行]'란 시다. 어린 아이까지도 군대에 나가야 한다며 돈을 뜯어내는 아전들의 간악함을 고발했다.

김창흡·이규명과 망형지교 맺어

   
▲ 남목 지명의 유래가 된 마성.

 


홍세태는 조선 효종 4년(1653년) 무관이었던 아버지 익하(翊夏)와 어머니 강릉유씨(江陵劉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영조 1년(1725년)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73세. 자는 도장(道長). 호는 유하(柳下) 또는 창랑(滄浪). 본관은 남양(南陽). 다섯 살에 책을 읽을 줄 알았고, 나이 들어서는 경사(經史)와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하지 않는 것이 없을 정도로 글재주를 타고 났으나, 중인이라 제약이 많았다. 23세 때인 숙종 1년(1675년)에 잡과인 역과(譯科)에 응시하여 한학과(漢學科)에 합격했으나, 체직으로 벼슬길에 오르지 못했다.

북악산 아래에 영의정 김수항의 셋째 아들 김창흡(金昌翕)이 낙송루(洛誦樓)를 짓자 한 동네에 살던 인연으로 그곳을 드나들었다. 동갑내기 김창흡·이규명(李奎明)과 신분을 따지지 않는 친구가 됐다. 상당수 사대부들과도 절친하게 지냈다. 뒷날 이규명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홍세태는 그의 시집 발문에서 처음 만난 때를 회상하며, "만나는 순간에 마음이 맞은 것이 마치 돌을 물에 던진 듯하여, 망형지교(忘形之交)를 허락했다."고 적었다. 양반과 중인·상민이 신분 차이를 잊고 친구처럼 사귀는 것이 망형지교다.

김창흡의 주선으로 숙종 8년(1682년)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첫 기착지 대마도에서부터 인기가 대단했다. 역관 홍우재의 '동사일록(東日錄)'에 "서승(書僧) 조삼(朝三)과 홍세태 등이 반나절 시를 주고 받았다"고 적혀 있다. 많은 일본인들이 잇따라 찾아와 시를 지어줄 것을 청했다. 시만 지어준 것이 아니라, 그림도 그려 주었다. 한학과에 합격한지 20여년이 지난 46세에 이문학관(吏文學官)이 됐다.

중국 사신이 우리 나라의 시를 보고 싶어하자, 좌의정 최석정(崔錫鼎)이 숙종에게 그의 시를 추천하여 임금에게 호감을 얻었고 제술관(製述官)에 임명됐다. 여러 하위 직급을 전전하다가 파직됐다. 그가 재능과 맞지 않게 궁핍하게 사는 것을 애석하게 여긴 좌의정 이광좌(李光佐)의 도움으로 67세 때인 숙종 45년(1719년)에 울산의 감목관(監牧官)이 됐다. 경종 2년(1722년)에 제술관으로 옮길 때까지 3년여 남짓 근무했다.

'동축사'는 이렇게 읊었다. "서축에서 날아와 어느 봉우리가 됐는지/ 천만리 머나먼 길, 용처럼 달려왔겠네./ 산꼭대기엔 신라 옛 탑 그림자 드리우고/ 숲속 범종소리 은은하게 울려 퍼지네./ 황금 베푼 이 땅에선 진리의 세상 열리고/ 밝은 달은 빈 하늘의 부처님 얼굴이라./ 기나긴 밤 창(窓) 마주하며 잠 이루지 못하는데/ 성난 파도는 용솟음쳐 솔바람 소리와 함께 들려오네."

제술관으로 옮겨간 이듬해에 남양감목관이 됐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영조 1년(1725년) 정월 보름 아내 유씨에게 원고를 맡기고 죽었다. 당대의 문장가 이덕무(李德懋)는 그는 굶주리면서도 작품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간행비로 베개 속에다 백은(白銀) 70냥을 저축했다고 적었다. 그가 죽은 세 해 뒤 아내가 죽으면서 남편의 유고를 사위 조창회(趙昌會)에게 맡겼다. 영조 6년(1730년) 조창회 등이 '유하집(柳下集)' 14권을 간행했다.

 

 

 

   
▲ 동축사 뒤편에 위치한 택미암, 뚜꺼비 바위, 동대라고도 부른다. 목관 원유영은 부상효채라는 명필적을 남겨 놓았다. 방어진 제12경중에 제9경인 섬암모운의 경승지이기도 하다.

위항시 바탕 '천기진시론(天機眞詩論)' 주장

그는 자기의 시가 항상 참신하기를 희망했다. 천기진시론(天機眞詩論)을 주장했다. 천기는 태어날 때부터 하늘에서 부여받았던 본래의 순수한 마음인데, 조탁하거나 수식하지 않고도 시를 지을 수 있는 바탕이다. "위항인의 시는 하늘에서 얻은 것으로, 초절(超絶)하여 당풍(唐風)에 가깝고 사경(寫景)함이 맑고 원만하여 봄의 새소리 같으며 서정(抒情)이 비절(悲切)하여 가을 벌레소리 같으니 느끼어 노래함이 천기(天機) 중에 자연 유출되지 않음이 없으므로 그것이 곧 진시(眞詩)"라고 했다. 위항시(委巷詩) 옹호의 근거가 됐다.

쉰 살쯤에 북악산 아래에 집을 짓고 유하정(柳下亭)이라 이름했다. 좌우에 등잔과 책을 놓고 그 사이에서 시를 읊었지만, 살림살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아내와 자식들이 굶주렸지만, 마음에 두지 않았다. 8남2녀의 자식은 병이 들어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위항시인 정내교는 스승 홍세태를 처음 만난 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처음 유하정에서 공을 뵈었을 때, 공의 나이가 벌써 쉰이나 됐다. 수염과 머리털이 희끗희끗한데다, 얼굴빛은 발그레해서 마치 신선을 바라보는 듯했다.

제자를 기르는 한편 임준원(林俊元)과 최승태(崔承太), 유찬홍(庾纘弘), 김충렬(金忠烈), 김부현(金富賢), 최대립(崔大立) 등의 중인들과 시회를 가졌다. '낙하시사(洛下詩社)'. 김창흡의 형 대제학 김창협(金昌協)의 권유를 받아 위항시인 시선집의 편찬에 나섰다. 효종 9년(1658년)에 '육가잡영(六家雜詠)>이란 위항시인 시선집이 나온 이후 50여년이 지나면서 별도의 시선집이 필요하자, 김창협이 시선집의 편찬을 권유했던 것. 홍세태는 '모래를 헤쳐 금을 가려내듯', '사람들이 외우기에 알맞은 시'를 찾느라 10여년간 심혈을 기울였다. 박계강(朴繼姜)을 비롯한 위항시인 48명의 225제(題) 235수(首)의 시를 골랐다. 숙종 38년(1712년)에 시선집 '해동유주(海東遺珠)'를 펴냈다. 김창협이 세상을 떠난지 4년 뒤였다. 그는 "잘못된 것이 있어도 바로잡아 줄 사람이 없는 것"을 아쉬워하며 머리말을 썼다. '해동유주(海東遺珠)>란 제목은 '해동에 버림받은 구슬>이란 뜻도 되고, '해동에서 시선집을 낼 때에 빠졌던 구슬>이란 뜻도 된다. 이름도 없이 땅속에 묻혀버릴 뻔했던 위항시인의 작품이 후세에 전해졌다.

감목관 생활을 그린 '말몰이' 등 지어 

 

 

그의 시 중에는 감목관 생활을 생생하게 표현한 '호랑이 사냥[捉虎行]'과 '말몰이[捉馬行] 등의 시가 가슴에 닿는다. 목장 풍습을 진솔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신분제약의 굴레를 씌우고 있는 사회에 대한 분노를 보여주는 자전적인 시 '염곡칠가(鹽谷七歌)' 또한 눈길을 끈다. 당시 사회현상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데다, 시적 긴장감이 살아있음이다.

'말몰이'는 이렇다. "방어진 동쪽은 바다에 닿았는데/ 목장엔 수초 우거져 수만 마리 말이 있다네./ -중략(中略)- / 우리 나라 마정(馬政)은 이곳을 의지한다네./ 해마다 가을이면 살찌고 튼튼해져/ 목관(牧官)은 명에 따라 굳센 말을 바친다네./ 바닷바람 서늘하여 풀잎이 시들 무렵/ 별 보고 일어난 목부들 새벽밥을 먹는다네./ 큰 채찍으로 말 몰아 골짜기로 내려오니/ 유성처럼 내달리며 우박 흩어지듯 입에 거품 문다네./ 처음엔 구름 밟고 하늘 벽을 스치더니/ 홀연히 바라보니 바람 따라 넓은 땅을 내달리네./ -중략(中略)- / 말 기르다 재주 끊어질까 두려운데/ 황폐한 시골에서 헛되이 늙어만 간다네."

세상을 떠나기 4년 전 69세에 지은 자전적인 시가 '염곡칠가(鹽谷七歌)>. 첫 수(首)는 이렇다. "나그네여, 나그네여, 그대의 자가 도장(道長)이라지./ 자기 말로는 평생동안 강개한 뜻을 지녔다지만,/ 일만 권 책 읽은 게 무슨 소용 있나./ 늙고 나자 그 웅대한 포부도 풀더미 속에 떨어졌어라./ 누가 천리마에게 소금수레를 끌게 했던가?/ 태항산이 높아서 올라갈 수 없어라./ 아아! 첫번째 노래를 부르려 하니/ 뜬구름이 밝은 해를 가리는구나." 세상은 천리마같은 그에게 소금수레나 끌게 했지만, 그는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천기를 보전하며 참다운 시를 짓는 데에 평생을 바쳤다. 그의 이름이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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