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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무상급식 사태의 주인공이 오세훈에서 곽노현으로 바뀐 느낌이다. 세치 혀만큼 입맛이 자주 변하는 여론은 오세훈의 눈물에 오만가지 상상력을 동원하더니 이제는 곽노현의 야릇한 미소에 각주를 달기 시작했다. 뒷담화 같은 이야기지만 오세훈은 절묘한 타이밍을 놓쳤다. 초상에는 일을 벌이지 않는다는 말처럼 서울이 수장된 마당에 주민투표를 강행한 악수는 자충수였다는 소리부터 곽노현의 침몰 이후 주민투표 카드를 들고 나왔으면 상황이 달라졌다는 인과관계조차 모호한 해설이 세상에 떠돌고 있다. 본질과 무관한 이같은 설은 세상을 현혹한다. 무심한 이들이 왜 세상 일에 냉소적인지는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자신의 잣대로 계산기를 두드리는 말잔치가 쏟아지니 냉소는 아예 냉동으로 견고한 성을 쌓을 만도 하다.
 서울시민들이 아이들의 밥을 두고 벌인 정치권의 선택을 외면했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밥을 먹이자는 쪽과 묻지는 말고 따져보고 난 후에 밥을 먹이자는 쪽이 팽팽했지만 시민들의 선택은 냉소였다. 이른바 '무상급식' 주민투표 무산이다. 밥을 가지고 온 나라가 들썩이고 있는 꼴이 볼썽사나운 일이지만 우리의 정치수준이 이정도이니 어쩌랴. 이민을 가지 않는 한 떨칠 수 없는 것이 우리 정치다. 밥을 두고 매일같이 쏟아지는 우격다짐 속에서 살다보니 이 말이 저 말 같고 저 말이 이말 같은 형국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만큼 밥에 목숨 건 민족도 드물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침 인사는 "진지 잡수셨습니까?"였고 오랜만에 만난 일가붙이에게 어른들은 꼭 "자네 밥은 먹고 다니나?"로 인사를 대신했다. 바쁜 걸음에 잠시 다녀가는 길손에게도 "차린 것은 없지만 식사라도 하고 가세요?"라는 인사는 빼놓지 않았고, 짧은 점심시간이 지나면 "오늘 뭐 먹었어?"로 관심을 표현하는 게 우리다. 오죽하면 가족을 식구(食口)라고 했을까. 식구는 말 그대로 '밥을 먹는 입'이라는 뜻이다. 가난한 살림살이에는 "먹매가 제일 크다"는말이 있었으니 먹고사는 게 생활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바로 그 밥이 우리 사회를 흔들고 있다. 아니, 좀 더 본질적으로 이야기 하면 밥이 아니라 밥을 복지로 덧칠한 정치가 빨간 옷과 파란 옷을 입고 춤을 추고 있다.
 울산에서도 밥 이야기가 본격화되는 양상이다. 주민투표 무산이 마치 무상급식 전면실시의 가처분신청이라도 받은 양 요구의 목소리는 갈수록 우렁차다. 가만히 따져보자. 공짜로 밥을 주는데 잘사는 집 아이와 못사는 집 아이를 구분하는게 될 말인가. 먹는 것 가지고 이쪽저쪽 나누는 건 치졸하다. 맞는 말이다. 지금은 초등학교라 부르지만 과거 국민학교 시절, 우유와 빵을 급식할 때, 이른바 좀 사는 집 친구들은 말랑말랑한 빵과 우유를 점심 때만 되면 공급받았다. 먹지 못하는 아이들은 친구이자 부러움의 대상인 그들의 입을 응시했지만 아무도 지금처럼 나쁜 급식을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때 그 시절, 빵과 우유는 차별의 대상이거나 빈부의 상징으로 각인되지 못했다. 왜 그럴까. 1970년대 초는 우리에게 복지라는 개념이 낯설었다. 우리 사회 어느 구석에도 복지는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고 그저 먼나라 이야기에 불과했다. 그런 사회 구조 속에서 내 것이 아닌 빵, 내 부모가 돈을 내주지 못한 우유는 그저 남의 것이었고 침만 삼킬 수 있는 대상이었다. 그런 개념이 무의식 중에 자리한 아이들에게 나쁜급식은 전혀 나쁠 것이 없는 급식이었고 적어도 나의 아이들에게는 빵과 우유를 맘껏 먹일 수 있는 아비가 되어야 한다는 다짐을 키우는 훌륭한 지침이었다.
 문제는 현장에서 벌어지는 차별이다. 미국의 아이들이 전부 무상급식을 하지 않는데도 차별을 느끼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국이나 독일의 아이들 역시 먹는 문제로 차별을 느끼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들이 모두 전면 무상급식을 하는 것도 아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차별을 조장하는 사회는 어른의 질서가 왜곡된 사회다. 어른들의 사회가 내편과 네편으로 나뉘고 빈자와 부자로 나뉘고 좌와 우로 나뉘면 아이들의 의식 역시 이분법에 길들여 진다. 지금 우리가 그렇다, 착한투표 나쁜투표에 착한급식과 나쁜급식이 으르렁거리며 손톱을 세운다. 먹는 문제를 이분법에 들이대면 착한쪽이 무조건 이긴다. 해볼 필요도 없는 싸움에 목숨을 건 오세훈의 실책은 여기에 있다. 물론 투사가 되고 싶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시대에 투사는 혈서를 쓰거나 삭발을 하기엔 그런류의 퍼포먼스는 너무 흔하다. 식상한 방법으로 투사가 되기엔 세상이 그만큼 순수해야 하지만 천만에 말씀이다.

 단계적 무상급식이든 전면 무상급식이든 형편대로 해나가면 된다. 복지를 유지할 지속가능한 재원이 가능하다면 무상급식의 범위를 넓혀나가면 될 일이고, 아직 멀었다면 단계적으로 문제를 풀어가면 된다. 문제는 밥을 먹는 아이들이 나는 공짜밥을 먹고 있고 저 아이는 돈을 내고 먹고 있다는 식의 구분을 하지 않는것이 중요하다. 착하고 나쁜 것은 정치적 수사가 아니라 바로 현장에서 더 큰 문제가 된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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