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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과 고래 ② 최초의 포경선과 포경회사
김종경대기자의 울산공부방
2011년 08월 31일 (수) 21:04:52 김종경 kimj@ulsanpress.net
   
▲ 1980년대 남구 장생포항에 정박중인 포경선. 상업포경금지 이후 대부분 폐선됐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고 송두리째 빼앗겼던 포경 어장이 우리 품으로 돌아 왔다. 울산의 장생포는 우리 나라 유일의 포경기지로 부활했다. 일제 때 포경에 종사했던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바야흐로 우리 손으로 최초의 근대포경업이 시작될 새날이 밝았다.

 광복 다음달 1945년 9월에 들어서자 일제의 포경업에 종사한 100여명이 모여 일본해양어업통제주식회사 조선종업원 자치위원회를 만들었다. 산파역은 일본수산주식회사 포경부에 근무했던 20대 후반의 김옥창(金玉昌·2005년 작고)씨. 위원장은 일본의 포경선에서 조기장을 지낸 박덕이(朴德伊)씨가 맡았다. 자치위원회는 장생포 포경사업장을 보호하는 등 포경업 준비에 들어갔다.

 김옥창씨는 세 가지 방침을 마련했다. ① 우리의 포경업은 민족자본으로 세워 외국인의 간섭을 배제한다. ② 포경기술을 습득한 300여명이 귀국하면 포경업에 취업할 기회를 주고, 그들의 숙련된 기술을 이용하여 단시일에 남극해와 북태평양의 포경에도 진출한다. ③ 국내에서는 포경선을 건조할 능력이 없으므로 일본에 가서 구하기로 한다.

 1945년 12월 중순에 김옥창씨를 비롯한 6명으로 짜여진 대표단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해양어업통제주식회사 측과 협상을 벌였다. 대표단은 일본해양어업이 보유하고 있던 21척의 포경선 가운데 제6정해호와 제7정해호 2척을 넘겨받기로 했다. 포경선 인수대금은 우리 측 포경선원의 퇴직금과 위로금, 그리고 김옥창씨의 사재로 충당했다.

 1946년 2월에 먼저 넘겨받은 '제7정해호'가 만국기를 매달고 고동소리를 울리면서 장생포항에 들어왔다. 주민들이 몰려 나와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당시 우리 손으로 포경업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냉소적인 분위기였으나, 포경선이 들어오는 광경을 목격하고는 이제는 정말 고래를 잡게 됐다며 인식을 달리했다고 한다. 두 달 뒤 4월 16일에 광복 후 최초로 범고래 한 마리를 잡았다.

 그리고 3개월 뒤 제6정해호도 장생포항에 들어왔다. 제6정해호는 130마력에 길이 21m, 너비 5m. 제7정해호는 105마력에 길이 20.2m, 너비 4.9m. 포수는 6정해호는 박선이(朴先伊), 7정해호는 서용이(徐龍伊)씨. 두 척은 목선(木船)으로 우리가 소유한 최초의 노르웨이식 포경선이었다. 비록 일본에서 들여 온 작은 중고(中古) 포경선이었지만,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식 포경업을 개척할 주역으로서 소중한 존재였던 것이
다.

 포경선이 갖춰짐에 따라 1946년 9월 7일 우리 나라 최초의 포경회사 '조선포경주식회사(朝鮮捕鯨株式會社)'가 설립됐다. 설립자본금은 당시 돈으로 500만원(圓). 지분은 김옥창씨가 60%, 종업원 측이 30%, 기타 인사가 10%를 가졌다. 사장은 박덕이씨, 전무는 김옥창씨가 맡았다. 상무 이경화(李京華), 이사 서상이(徐相伊), 상임감사에는 조동완(趙東完)씨가 선임됐다. 본사는 서울시 중구 동자동 12번지에 두었다.

 회사 설립 다음달에 포경선을 늘렸다. 1946년 10월 6일에 청진호와 제2동아호를 사들여 포경선으로 고쳤다. 네 척으로 늘었다. 1947년 12월에는 기선저인망어선을 사들여 운반선으로 개조했다. 포경선 규모가 제법 짜임새를 갖추면서 고래잡이 실적도 양호했다. 1946년 여름부터 조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이후 9월 초순까지의 짧은 기간에 큰고래 27마리를 잡아 신문에 실리는 등 일반인의 주목을 끌었다. 거의가 참고래였다.

 조선포경의 설립을 시작으로 포경회사가 잇따라 들어섰다. 1947년에 이영조(李永兆)씨가 장생포에 대동포경주식회사(大同捕鯨株式會社)를 설립했다. 1948년에는 방어진에서 울산 수산업계의 원로 백상건(白尙健)씨가 동양포경주식회사(東洋捕鯨株式會社)를 만들었다. 방어진항 동쪽 동진마을에 해체장을 두었다. 1949년에는 장생포에 금린포경주식회사(金鱗捕鯨株式會社)가 설립됐다. 김성준(金聲俊)씨가 만든 개인회사.

 우리 손으로 포경에 나선 1940년대 후반기에는 참고래 위주의 고래잡이를 했다. 그런 한편에서는 일제 말기에 시작된 밍크고래 잡이도 있었다. 일제 때 설립된 조선수산개발주식회사(朝鮮水産開發株式會社)가 광복 이후에도 그 맥을 이었다. 한국인이 관리인이 있으면서 어선에서 포경선으로 개조된 제11대경호와 제29흥안호 두 척으로 1946년 여름부터 밍크고래 잡이를 시작했다. 다음해 3월 중순까지의 기간에 39마리의 밍크고래를 잡는 비교적 좋은 실적을 올렸다. 그렇게 순수 우리 손으로 시작한 포경업은 처음에는 대형고래인 참고래 위주의 고래잡이에서 자원의 고갈로 밍크고래 위주로 바뀌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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