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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열사 떠나 보내고
수만명 노동자 품에 안아
한 평생 약자 편에 선 삶
그뜻 그대로 이어나갈 것

오늘은 민중, 노동운동의 역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나시는 날이다. 지난 7월 심장이상으로 쓰러져 투병을 해오시다 9월 3일 향년 82세의 나이로 영면에 드셨고, 오 일 동안 추모기간을 거쳐 민주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른 후 아들 전태일이 묻혀있는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되신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던 전태일 열사가 죽음을 각오한 이후로 이소선 어머니에게 노동법 배우기를 거듭 당부했다고 한다. 열사가 어머니에게 남긴 마지막 말도 "엄마, 내가 죽어서 캄캄한 세상에 좁쌀만 한 구멍이라도 뚫리면, 그걸 보고 학생하고 노동자하고 같이 끝까지 싸워서 구멍을 조금씩 넓혀야 해요"였다. 어머니는 이후 아들의 뜻대로 살아가셨고, 한 명의 아들을 떠난 보낸 대신 수 천 수 만의 노동자들을 품에 안은 우리 시대의 어머니가 되셨다.

 이소선 어머니는 사는 동안 밤낮으로 제 피붙이 마냥 노동자들 생각에 노심초사하셨다. 아들 전태일을 열사로 가슴에 묻은 때문에 세상 모든 노동자들의 투쟁에 가슴 졸이고 고통 받는 노동자는 절대 외면 않으셨다. 어머니는 늘 "죽지 말고 나랑 같이 싸워서 반드시 이기자"고 당부하셨다. 의식을 잃기 전 유언이 되어버린 마지막 말도 한진중공업 고공크레인에 올라가있는 김진숙 지도위원에 대한 걱정이었다. 희망의 버스를 타고 부산에 내려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전하며 "김진숙이 죽으면 아무것도 못하니까 죽지 말고 살아서 싸우자"고 말씀하셨다.

 이소선 어머니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노조인 청계피복노조를 이끌며 '근로조건 개선과 노동조합 결성' 등 요구를 정부로부터 약속 받았고, 한국 최초의 노동자 교육의 장인 '노동교실'을 열어 노동법을 가르쳤다. 군사독재 시절엔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 초대회장을 지내면서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 목숨을 잃은 이들의 가족을 위로했다. 그러는 동안 수백 번 연행되고 3년 여의 옥살이를 하기도 했지만, 이소선 어머니는 결코 노동자들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최근까지도 용산참사, 기륭전자, 쌍용자동차 투쟁 현장에 함께 했고, 올 초에는 정리해고된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을 찾아 격려하셨다.

 이소선 어머니는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으셨다. 비정규직이라며 기본적인 권리마저 박탈당한 노동자가 없어야 하고, 뼈 빠지게 일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정리해고 당하는 일은 없어야 하고, 노동자라고 무시당하지 않고,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실 뿐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로서 너무도 소박한 바램은 아직까지 이 땅에서 너무도 어려운 일이기에 어머니는 마지막 가시는 걸음마저 김진숙 지도위원에 대한 걱정으로 힘겨운 걸음을 옮기셨다. 어머니는 어느 시인의 추모시 제목처럼 '어머니는 이 시대의 미륵이셨다'

 오늘 이소선 어머니를 떠나보내는 우리 노동자들은 제 어미를 잃은 자식들처럼 함께 가슴 아파하고 있다. 1970년 청계피복상가의 청년노동자 전태일이 "노동자도 사람" 임을 선언했던 그 날 부터 모든 노동자들의 어머니가 되셨기에 지난 40여 년 동안 성장한 천 오백 만 명의 노동자들이 어머니의 말씀을 가슴에 묻는다. 어머니가 그토록 바래왔던 모든 노동자가 사람답게 사는 평등한 세상을 향한 약속을 깊게 새긴다. "이소선 어머니 편히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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