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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지식인 사회의 정치지향성은 아무도 말릴 수 없는 모양이다. 이상 정치를 외치던 공자가 수레를 끌고 수십년간 '정치세일즈'를 했던 것은 명분 때문이었지만 현실정치에서 그는 언제나 기득권층의 공격목표가 됐다. 이상을 구현하기에는 현실의 벽이 너무 높기에 그 벽을 감지한 공자는 결국 고향에 은거하며 제자들과 수담으로 한세상을 하직했다. 공자가 그럴진대 일개 지식인들이 정치와 무관하게 살 수 있을까. 그 답은 역시 없다는 사실이다.
 악성 바이러스가 정치판의 구석구석에 퍼져 몸통을 완전히 들어내야 한다는 외침을 들고 나온 안철수가 그렇다. 보통 백신으로 제거할 수 없는 악성 균이기에 백신 제조자가 나서야 판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행동하는 지성인답다. 안철수의 등장으로 정치판은 일단 흥행 구도를 잡았다. 희망제작소를 함께했던 동지에게 손을 들어주는 모습도 신선하다. 정치라는 단어만 들어도 무미건조하고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던 유권자들은 안철수의 다음 행보에 눈빛이 반짝거리고 있다. 안달이 난 곳은 정치권이다. 고정표와 견고한 지지층이 언제까지나 우군이 될 줄 알았던 여야 모두는 '니편내편'이 아닌 유권자들의 싸늘한 낯빛에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이른바 우리 시대의 지성인으로 자처하는 정치인들의 모양새가 딱하게 됐다. 하지만 어쩌랴, 정치가 생물이듯 유권자들의 마음도 살아 있는 생물이기에 곁눈질 하는 사이 불쑥 자라 다른 모습으로 돌변한다. 지성이 흔들의자에 몸을 맡기면 고체가 된다. 햇살과 바람, 흙먼지가 공존하는 들판에 서지 않으면 총기와 유연성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온몸이 굳어 딱정벌레처럼 웅크리게 된다.
 그 증거가 바로 보수다. 보수는 야전에서는 백전백패한다. 특히 우리의 경우 보수는 천근 무게의 기왓장에 눌려 사모와 관대를 두른 채 자라났기에 빠르고 능란한 진보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조차 꺼려한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 사회를 지탱해온 보수의 오늘이 그렇다. 기왓장 아래에서 자라 체육관에서 수장을 뽑던 버릇이 습관으로 자리해 어느새 우리의 진보는 대부분 수동형 인간이 됐다. 그러다보니 무겁게 치장한 사모와 관대를 벗어버리면 근육질은커녕 핏기조차 없는 몰골이 되고 만다. 그 보수가 현실안주라는 단단한 껍질 속에서 썩고 있다는 게 안철수의 진단이다.
 백신박사의 현실진단은 자극적이다. 멘토가 보수인사라니 혹시나 우군일지 모른다고 화색이 돌던 보수세력은 안철수가 내놓은 깃발이 '반한나라'의 붉은 글씨로 펄럭이자 주특기인 비난의 수위를 올리고 있다. 이른바 '팍스로마나(Pax Romana) 의 이중성'이다. 돌기둥에 비단을 휘감은 로마의 지식인들은 스스로 문명인을 자처했다. 자신과 같은 옷, 같은 지붕 아래 살지 않는 인간은 모두가 야만인이었고 그 중에 전쟁포로는 원형체육관 속 유희의 대상으로 갖고 놀았다. 내편이 아니면 야만이자 '빨갱이'인 사회는 희망이 없다. 극과 극 사이에 중간지대가 없는 공간은 그 경계에 불꽃이 튀기기 마련이다. 보수는 그 싸움에서 믿는 구석이 있다. 말을 듣지 않으면 검투사 앞으로 끌고가 철퇴와 칼로 난도질 하면 그만이었다.

 원형체육관의 기둥이 튼튼한 시절에는 그 방법이 유효했다. 상하와 좌우가 뚜렷하니 적과 동지가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21세기다. 보수가 견고한 껍질 속에 있을 때 진보는 진화를 거듭했다. 진보는 보수의 이중성을 집요하게 공격해 왔다. 보수의 허를 찔러 그동안 헛기침 하며 목청만 높인 보수를 공격했다. 근거도 있다. 예를 들면 "계몽주의 철학자 루소는 자기 아이들을 고아원에 내다버렸다." "논쟁을 즐긴 철학자 러셀은 의견이 다른 사람에게 저주를 퍼붓던 망상증 환자였다."는 식으로 보수지성의 이중성을 공략했다. 루소가 아이들을 고아원에 버린 것은 사실이다. 러셀이 다른 이의 이야기에 귀를 막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도 근거가 있다. 눈에 보이는 근거는 대중의 동의를 구하게 만든다. 보수는 억, 소리 한 번 못하고 들판의 싸움에서 밀리게 된다. 그 밀린 보수가 지금 휘청거리고 있다.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는 보수정치인의 말이 그래서 서글프게 들리지만 배 밖에 나온 간이 보수정치인을 보수 골통으로 손가락질 하는 순간 그는 골통이 되는 게 현실이다.

 문제는 진보에게도 보수만큼의 이중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 좌파지식인의 대부 격인 노엄 촘스키가 그렇다. 그는 미국 기업을 '사적 독재자'로 몰아붙이면서 스스로는 주식투자에 열중했고, 자본주의를 욕하면서 강연료와 인세 수입으로 가능한 호화주택으로 이사를 다녔다. 실제로 촘스키는 9·11 테러 이후 1회 9,000 달러의 강연료를 1만 2,000 달러로 올렸고, 국방부를 '미국의 암'이라고 비난하면서 국방부 연구비를 받아썼다. 그렇다고 우리의 진보가 촘스키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촘스키에 버금가는 인사들이 좌파, 혹은 진보의 가면을 쓰고 들판에서 깃발을 흔들고 있으니 들판에도 백신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안 박사는 바로 그 백신도 준비하고 단일화 이후의 정치판에 나서야 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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