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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성지

"국내의 각 고을에는 모두 지지(地誌)가 있지만, 유독 울주(蔚州)에는 아직 있지 않다. 을묘년(乙卯年, 조선 영조 11년·1735년) 내가 외람되게 이 고을의 수령이 되니, 고을의 부로(父老)들이 청하기를 읍지(邑誌)를 만들어 후인들이 살필 수 있게 하고, 뒷날 왕부에 바칠 것을 대비하자고 했다. 상사(上舍) 박망구(朴望久)와 사인(士人) 이원담(李元聃)에게 부탁하여 옛 기록을 널리 가려서 초본(草本)을 만들었다. 무오년(戊午年, 영조 14년ㆍ1738년) 겨울에 상자에 넣어서 집에 돌아왔다. 일기(一紀, 12년)가 다 됐는데도 이루지 못했다. 여러 부로들이 편지를 보내 재촉함에 초본 중에서 번잡한 것을 깎고 소략한 것을 늘려 고쳐 써서 보냈다."

 

# 부사로 재직 울산 문풍 확산에 역량
조선 영조 25년(1749년)에 만들어진 울산 최초의 인문지리지 '학성지(鶴城誌)'의 편찬자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이 쓴 학성지의 서문 '학성지서(鶴城誌序)'의 한 부분이다. 울산남구문화원이 지난해 4월 학성지가 만들어진 때로부터 260여년만에 펴낸 번역본에 자세히 나와 있다.

 권상일은 울산부사로 재직할 때 학성지를 편찬하는 등 문풍(文風)을 높이는 데에 힘썼다. 목민관이라면 백성이 먹고 살기에 지장이 없이 편안케 해야 하고, 교화에 힘써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권상일은 그런 차원을 넘어 울산의 품격을 높이는 데에도 역량을 쏟았다. 학성지의 편찬과 구강서원의 정비, 울산의 앞날을 이끌어갈 향교 학생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울산부사로 부임한 해인 조선 영조 11년(1735년)에 학성지 편찬에 들어갔으나 재임기간에 마무리짓지 못했다. 14년 뒤 영조 25년(1749년)에 마쳤다. 울산으로서는 주민 삶의 모습을 한 눈에 살필 수 있는 인문지리지를 가졌다는 점에서 자긍심을 갖는 계기가 됐다.

 물론 33장 1책이라는 소략한 내용으로는 울산의 온갖 모습을 살피기에는 적잖은 한계를 안고 있었다. 그래도 지계(地界)와 산천(山川), 연혁(沿革), 전부(田賦), 군부(軍簿), 성씨(姓氏), 풍속(風俗), 토산(土産), 성곽(城郭), 관방(關防), 관해(官  ), 누정(樓亭), 학교(學校), 역원(驛院), 사묘(祠廟), 고적(古蹟), 명환(名宦), 인물(人物), 충렬(忠烈), 제영(題詠) 등으로 항목을 나눠 서술함으로서 당시의 모습을 알리는 데에 모자라지 않았다. 이후 나오는 여러 지지(地誌)의 저본(底本) 역할을 했다.
 
# 구강서원 정비·학문 진작에 힘써

   
▲ 권상일은 울산부사로 재직할 때 학성지를 편찬하는 등 울산의 품격을 높이는데 힘썼다. 또 지역 명물인 반구대를 자주 찾아 시를 짓기도 했다.


울산에는 세종조 초에 만들어진 향교가 있었지만, 학교 시설이 모자랐다. 유림이 서원 건립에 나선 것은 효종 10년(1659년) 2월의 향교 석전제에서 창건을 발의하면서였다. 자금을 모으는 일이 여의치 않아 숙종 2년(1676년)에 지금의 중구 반구동, 즉 구강(鷗江)에 서원건립에 들어가 다음 해(1677년) 사당과 강당 등을 완공했다. 발의한 때로부터 18년만의 일. 숙종 5년(1679년) 1월에 정몽주와 이언적의 위패를 모셨다. 3월에 대대적인 서원건립 축하행사를 열었다. 숙종 8년(1682년)부터 국왕의 사액을 청원하는 운동에 나섰다. 네 차례의 청원 끝에 숙종 20년(1694년) 3월 남인의 집권기에 사액을 받았다. 청원운동에 나선 지 12년만이었다.

 권상일은 울산부사로 있으면서 구강서원에 없는 시설을 짓고 문풍을 일어나게 했다. 부임 첫 해 8월에 공사에 들어가 다음해 여름에 동·서재(東西齋)를 짓고, 낡은 건물은 고쳤다. 울산대학교 성범중 교수가 지은 '한시 속의 울산산책'에 당시 건물을 지은 뒤에 쓴 글이 나온다. "동서의 재와 헌(軒)이 각기 4칸인데, 낮은 담을 둘렀고, 가운데에는 정문을 설치했다. 사치하지 않고 누추하지도 않아서 진실로 여러 선비들이 무리지어 거처하며 강독하기에 적합했다. 동재는 상지(尙志), 헌(軒)은 인지(仁智), 서재는 경신(敬身), 헌은 광제(光霽), 문(門)은 유의(由義)라고 했다."

 그 책에는 권상일이 구강서원을 찾는 선비들이 가져야 할 자세를 적은 '구강서원, 시권 속에 있는 여러 시에 차운하다[鷗江書院次卷中諸韻]'란 시 세 수(首)도 실려 있다. 둘째 수를 보자. "우리 동방 두 분 선생/ 끼치신 사당이 대숲 사이에 있네./ 방법이 있어서 일찍이 물을 보시고/ 일정한 때 없이 길이 산을 마주하시었네./ 가까운 나라여서 먼저 교화를 입었는데/ 우리 중에 누가 청렴하고 완고한가?/ 힘써야 하리, 그대 악기 울리고 노래하는 선비여/ 쉬지 말고 공부하시라."

 향교의 학생에게도 공부하는 방법과 자세를 일러주기를 잊지 않았다. '향교에 기숙하는 학생에게 부치다[寄校中居齋諸君]'란 시를 지어줬다. "공자 곁에 우뚝한 여러 철인(哲人)이 계시니/ 때 맞은 비와 온화한 바람이 황홀하게 집에 가득하네./ 경의(敬義)라는 두 말은 친밀하나 주역(周易)과 관계되고/ 제수(齊修)라는 여덟 조목은 기술하여 장구(章句)가 되네./ 바라건대 집집마다 외우고 노래하는 풍속을 이루고/ 진중하여 임금에게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마을을 만드시라./ 그 속에서 생각하면 응당 마음에 느낌과 분발이 생기고/ 아침저녁으로 우러러 사모하면 국과 담에서 보이시리."
 
# 20세에 수양의 교본 '학지록(學知錄)' 지어
권상일은 조선 숙종 5년(1679년) 상주의 근암리(지금은 문경)에서 아버지 심(深)과 어머니 경주이씨 사이에서 태어나, 영조 35년(1759년)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80세. 본관은 안동. 자는 태중(台仲), 호는 청대(淸臺). 시호는 희정(僖靖). 문경 근암서원(近巖書院)에 배향됐다. 어릴 때 조부에게서 글을 배웠으며, 뒷날 서울에서 상주에 옮겨와 살던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20세에 독서와 몸을 수양하는 데 관계된 옛 사람의 교훈을 모아 '학지록(學知錄)'이라는 책을 엮어 심신을 닦는 교본으로 활용했다.

 숙종 36년(1710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가 됐으며, 여러 자리를 거친 뒤 숙종 46년(1720년)에 예조좌랑을 지냈다. 영조 4년(1728년)에 일어난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미리 탐지하여 보고하는 등 공을 세웠다. 영조 9년(1733년)에는 '퇴계언행록(退溪言行錄)'을 교열·간행했다. 다음 해에 민폐근절책과 관기숙정방안에 대해 상소하는 한편 경연에서 진술했다. 57세인 영조 11년(1735년) 4월부터 60세인 영조 14년(1738년) 12월까지 3년8개월간 울산부사로 재직했다. 영조 22년(1746년)에는 사헌부 집의를 거쳐 동부승지, 형조참의 등을 맡았다. 그 뒤 대사간과 홍문관 부제학, 한성좌윤, 대사헌 등을 지냈다.

 그는 이학(理學)의 규명에 학문의 목표를 두었다. 이(理)를 우주의 궁극적인 실체(實體)라 여겨 이(理)에 근거하여 기(氣)가 화생(化生)한다는 이생기론(理生氣論)을 펼쳤다. 이(理)가 먼저 존재한 이후에 기(氣)가 생성될 수 있다는 이선기후(理先氣後)를 근본으로 하는 이기생성론(理氣生成論)을 주장했던 것.
 저서로는 '청대집(淸臺集)'과 '초학지남(初學指南)', '소대비고(昭代備考)', '가범(家範', 등이 있다. 청대집은 18권 9책으로 정조 21년(1797년)에 간행됐다. 서문은 정종로(鄭宗魯), 발문은 그의 문인 조석철(趙錫喆)이 썼다. 청대집에 680여 수에 달하는 시가 실려 있다.

 

 

   
▲ 권상일은 울산부사로 있으면서 구강서원에 없는 시설을 짓고 문풍을 일어나게 했다.


 
# 자연경관에 매료 글로 남겨
그는 울산의 자연경관의 빼어남을 찬미하는 시를 짓는가 하면, 선비들과도 교유했다. 국문학자 최은주는 울산부사 시절의 그의 글쓰기를 "공사(公私)의 성격을 구분하며 썼다. 개인 취향의 사적인 글쓰기는 업무시간을 피해 여가를 활용하여 쓰고자 했고, 공식적인 글쓰기는 업무의 연장선상에서 쓰려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그가 글쓰기에서도 공사(公私)구분을 투철하게 했음을 알 수 있다. 공인(公人)으로서의 올곧은 자세를 지켰다.

 그의 시작(詩作)에 집중된 문학적인 글쓰기에 대해서는 "크게 개인적인 취향에서 이뤄진 것과 지방수령으로서 공식적인 행위의 연장선상에서 이뤄진 것으로 나뉜다.
 개인취향의 시는 유학자로서 문학욕구를 추구한 것이고, 수령신분을 의식하며 지은 것은 수령으로서의 본연이나 권학(勸學)과 관련하여 지역유생들에 대한 격려를 구체적으로 담은 것이다. 이 두 가지는 한 사람의 글쓰기에서 서로 통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때론 수령신분이 작용했다는 점에서 시의식의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고 분석했다.

 그가 울산도호부의 동헌인 일학헌(一鶴軒)에서 부사로서의 자세를 가다듬으며 지은 시를 보자. '일학헌 시에 차운하다[次一鶴軒韻]'란 제목으로 '한시 속의 울산 산책'에 실려 있다. "청헌(淸獻)의 배에 데리고 있던 학(鶴)이/ 높은 동헌에 편액(扁額)으로 걸려 있네./ 정신은 강에 비친 달에 가득 하고/ 금운(襟韻)은 대숲에 부는 바람에 느긋하네./ 조용히 앉아서 글을 읽고/ 깊이 생각하며 정무를 처리하네./ 옛 사람이 남긴 시 구절이 있기에/ 읊조리고 나서 또 머뭇거리네."

 김경을 비롯한 여러 선비와 교유했다. 어느 날 반구대를 찾는 길에 대곡천 초입의 정자에서 낭랑한 글 읽는 소리가 들려 정자에 들렸고, 글 읽던 선비가 김경이었다. 지금의 사연댐 아래에 있었던 김경의 정자 관서정(觀逝亭)을 종종 찾았다. '곡연의 정자[曲淵亭)'란 시를 보자. "반구대의 흥취가 곡연정까지 남아 있는데/ 한 그루 복사꽃이 작은 들에서 빛나네./ 새 울음소리 속에 그윽한 꿈을 깨고 나니/ 지는 햇살 속 돌아가는 길에 바닷가 산이 푸르네." 근처 선바위에도 들러 시를 남겼다.

 울산의 명승 반구대를 자주 찾아 시를 지었다. 태화강 뱃놀이를 즐겼다. 동대에도 올랐고, 동축사도 찾았다. 고려 때 정포로부터 이어진 울주팔경 시도 지었다. '반구대에서 짓다(盤龜卽事]'란 시를 보자. "푸른 산을 돌고 도니 길은 휩싸여 도는데/ 삼월의 선원(仙源)에 물길이 따라왔네./ 시내는 거문고 줄이 되어 장단을 연주하고/ 바위는 조화옹의 도끼질로 쪼이고 갈려서 열려 있네./ 나무꾼의 도끼는 신선의 바둑판에 썩고/ 구름 속의 학은 포은대(圃隱臺)로 날아 돌아오네./ 섭섭하게도 주인은 아득한 곳으로 돌아갔으니/ 떨어지는 꽃과 우는 새들도 다 슬퍼하네." 그의 시 작품에서 그 누구보다도 뜨거운 그의 울산사랑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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