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한국 포경사업의 기지 장생포항에 경사가 났다. 진양호가 장수고래를 잡았단다. 고래가 집채만하다는 말이 실감이 나는 날 장생포구는 잔치가 벌어졌다. 1974년

배는 그 어떤 것이라도 선장(船長)이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반면 고래를 잡는 포경선(捕鯨船)은 선장보다는 포수(砲手)가 으뜸이다. 포수의 능력의 우열에 따라 고래를 더 잡을 수 있거나 덜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포를 명중시키는 능력이 뛰어난 포수의 몸값이 높게 마련이었다.

 1945년 광복이 되고 일제강점기에 포경업에 참여했던 종사자들이 포경회사 설립에 나섰다. 이듬해 1946년 9월 7일 최초의 포경회사 조선포경주식회사(朝鮮捕鯨株式會社)가 설립됐다. 조선포경은 설립 7개월 전 그해 2월에 일본에서 우리 나라 최초의 포경선 제7정해호(征海號)를 사들였다. 4개월 뒤 6월에는 제6정해호를 도입했다.

 제7정해호의 포수는 서용이(徐龍伊)씨, 6정해호의 포수는 박선이(朴先伊)씨. 7정해호가 우리 나라 국적의 최초의 포경선이었으므로, 서용이씨는 우리 나라의 제1호 포경선 포수였다. 서용이씨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수산주식회사의 포경선을 탄 베테랑 선원이었다. 조선포경에서는 이사와 사업소장직을 지냈다. 포수가 없어 자진해서 포수생활을 했다.

 제6정해호의 포수였던 박선이씨는 조선포경의 사장이었던 박덕이(朴德伊)씨의 동생. 일본에서 오랜 기간 포경선을 탄 유능한 포경선원 출신이었다. 일본에서 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수산주식회사의 포경부에 근무했던 형 박덕이씨와 함께 형제가 우리 나라의 초창기 포경산업을 위해 온힘을 받쳤다.

 제7정해호를 일본에서 사들여 와 장생포항에 정박시킨지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은 1946년 4월 16일 인근 바다에서 고래가 뛰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조업에 나섰다. 범고래를 잡았다. 우리 포경선이 잡은 최초의 고래였다. 포수 서용이씨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 범고래를 잡은 날로부터 5개월 뒤에 만들어진 조선포경주식회사는 이날을 한국포경기념일로 정했다.

 당시는 연해에 고래자원이 많아 고래포획 실적이 좋았다. 하루에 2마리의 참고래를 잡는 날이 많았다. 체장도 평균 15m 이상 20m에 달하는 대형고래가 잡혔다. 1946년 여름에 조업을 시작한 이후 조선포경주식회사가 만들어진 9월 초순까지의 짧은 기간에 참고래 30여 마리를 잡았다. 1946년에 참고래 66마리를 잡았다고 한다.

 그에 따라 포경선을 늘려야 했다. 1946년 10월 초에 건착선을 사들여 포경선으로 개조해 청진호(淸津號)로 이름을 붙였다. 48년 8월 초에는 어선을 임대하여 포경선으로 개조한 뒤 동아호(東亞號)라 했다. 동아호에는 순수 우리 손으로 만든 포경포(砲)를 장착했다. 인천의 영화제작소에서 일본에서 사들인 정해호의 포를 분해하여 설계도를 만들어 제작했다.

 조선포경에 이어 1947년 4월에 장생포에서 이영조(李永兆)씨가 대동포경주식회사(大同捕鯨株式會社)를 설립했다. 그해 10월에 정어리건착선 2척을 사들여 포경선으로 고쳤다. 포수는 장상호(張祥浩)씨와 김무용(金武庸)씨. 장상호씨는 일제강점기 말에 두 해동안 포수생활을 했다. 장씨가 실질적으로는 7정해호의 포수 서용이씨보다는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는 최초의 포수였던 셈이다.

 장상호씨는 1906년생으로 67세까지 포경선원 생활을 했다. 16세에 갑판원으로 포경선을 처음 탔다. 33세 때 갑판장에 올라 남극해의 조업에 참여했다. 북극해에도 갔다. 그 때 엄청나게 많은 귀신고래를 보았으며, 에스키모인들이 창으로 고래를 잡는 것을 무수히 목격했다. 1945년 광복되기 두 해 전에는 일본인들이 한국인에게는 맡기지 않는 꿈에나 그리던 포수가 됐다. 그가 탄 포경선은 밍크고래를 주로 잡는 작은 목선이었다. 1958년에 대동포경의 어생호 포수 때 잡은 체장 25m의 참고래가 그가 잡은 가장 큰 고래였다고 한다.

 우리 나라 국적의 최초의 포경선 제7정해호의 기관장이었던 양기호씨도 1947년부터는 포수를 했다. 조선포경의 창설멤버였던 양씨는 1981년 은퇴할 때까지 35년간 포수를 지냈다. 그의 5형제 가운데 맏형 기식씨와 동생 원호씨도 한때 포경업에 관계했다. 양씨는 1967년 여름에 잡은 26m 체장의 참고래가 그가 잡은 가장 큰 고래였다고 한다. 장상호씨와 함께 가장 많이 고래를 잡았던 포수로 알려져 있다.

 우리 포경업의 1세대 포수는 이들 외에도 더 있다. 그러나 그동안의 관심부족으로 관련 자료가 없어 찾기가 쉽지 않다. 울산의 낮은 기록문화를 보여준다. 이들 1세대 포수의 뒤를 이어 이승길씨와 김상복씨 등의 2세대 포수들이 나왔다. 더 늦기 전에 울산광역시와 남구청이 울산의 고래의 역사문화를 체계화하고 집대성한 자료수집과 관련 서적 등을 펴내는 일에 열성적이었으면 한다. 고래도시 만들기는 인문학적인 바탕이 튼튼해야만 꽃필 수 있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