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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경희는 경주에 칩거하면서 영남 일대는 물론 전국을 유람한 조선 최고의 산수유람객이었다. 울산일대의 절경에도 소홀하지 않아 가지산 등에 올라 한시를 남기기도 했다. 남경희도 시를 남긴 작괘천과 작천정일대. 이창균기자 photo@ulsanpress.net

18세기 후반의 조선조에서는 한 가지 일에 몽땅 마음을 빠뜨린 이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기가 좋아하여 하는 일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아예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들 가운데에도 엇부루기로 허명만 요란한 이들도 있었으며, 물론 달통한 경지에 오른 전문가 반열에 드는 이도 상당수에 달했다. 일반인은 그들을 일러 벽(癖) 또는 치(痴)에 빠져 헤어날 줄 모르는 미친 사람이라고들 비아냥거렸지만, 달통한 경지에 오른 그 같은 이들이 없었다면 진정한 사회발전은 기약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 한라에서 백두까지 전국 유람
그 자신 벼슬길에서 물러나 후학을 기르며 각처를 유행(遊行)하면서 자유인으로 살고자 했던 남경희(南景羲)는 조선 최초의 전문 산악인이라 일컬어지는 창해(滄海) 정란(鄭瀾·1725-1791)과 교유했다. 남경희의 국토산하를 꾸준히 유람하는 산수병(山水病)도 정란에게서 말미암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정란은 여행이 그저 좋아서 조선의 산하를 누비고 다녔다. 종(縱)으로는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를 주행했다. 횡(橫)으로는 대동강에서 금강산까지를 빠뜨리지 않았다. 천생의 여행가였다.

 남경희는 정란이 타고 다니던 청노새가 유람길에 병들어 죽은 것을 애도하여 그의 부탁을 받고 시를 지어 주었다. <창해 선생은 기이함을 좋아하는 분/ 타는 것은 청노새이지 말이 아니라네./ 청노새는 연하(煙霞)의 자태를 타고났기에/ 구슬 재갈을 물고 옥 안장 얹은/ 붉은 도화마(桃花馬, 흰 털에 붉은 점이 있는 좋은 말)처럼/ 날마다 티끌 세상을 어찌 달리랴?/ 맹호연(孟浩然), 진도남(陳圖南) 같은 오골(傲骨)들이나/ 어깨를 움츠린채 타도록 허락하지./ 선생이 이를 타고 산수를 노닐어/ 청구(靑丘) 땅 수천 리를 걸어다니네./ 편자와 재갈로 다루지 않아도 몹시 순해서/ 가자는 대로 동서남북 어디든 가네./ 아침에는 백두산 아래를 걸어가고/ 저녁에는 한라산 꼭대기에 있네./ 봄바람에는 물을 차며 천천히 가고/ 해질 무렵에는 산을 찾아 날듯이 가네./ 금강산을 오르는데 길이 잘 들어/ 만이천봉 곳곳에 자취가 서려 있네./ 풍상에도 험한데도 언제나 따라가니/ 주인의 산수벽(癖)을 잘도 이해했지.>
 
# 경주 칩거 영남 문인들과 교류
남경희는 벼슬길에서 벗어나 향리 경주(慶州)에 칩거하면서 영남 곳곳을 주로 누비고 다녔다. 그의 발자취가 영남 일대에서 닿지 않은 곳이 없었을 정도였다. 그는 교유한 정란의 유행벽(遊行癖)에는 미치지는 못했지만, 만만찮은 산수유람객이었다. 그 장엄함에도 산세가 험준한 탓으로 좀처럼 찾기가 쉽지 않은 고산준령으로 뒤덮인 가지산(迦智山, 1,240m) 일대를 찾았다. 까마득한 석남 고갯마루를 오르며 시를 지었다. 울산대학교 성범중 교수의 '한시 속의 울산 명소'에 실려 있다.
 <우러러보니 삼만 길인데/ 구름 속의 나무는 하늘에 꽂혀 떠있네./ 높아서 넘기 어렵다고 말하지 말라./ 오르고 또 오르면 꼭대기에 이른다네. (仰看三萬丈 雲木揷天浮莫道高難越 登登到上頭) '석남고개에 오르다[登石南嶺]'> 비록 높고 험한 고갯길이지만, 한걸음씩 내딛다 보면 끝내는 꼭대기에 다다르게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담고 있다.

 

 

   
▲ 남경희는 가지산을 찾아 석남 고갯마루를 오르며 시를 남겼다. 가지산을 오르며 석남사도 들렀을 것으로 추측된다.


 석남고개를 그린 시를 남긴 것을 보면 석남사(石南寺)는 당연히 찾았으리라. 국토산하의 아름다움에 빠져 사방에 걸쳐 발자취를 남기지 않은 곳이 없는 그가 석남고개를 올랐다면 석남사는 물론 인근의 명승은 당연히 찾았을 것이다. 그는 영남 일대의 문인학자들과 친밀한 교분을 가졌기에 그들의 은거지를 즐겨 찾았다. 그의 발자취는 밀양과 영천 등 다른 곳에도 남아 있다.
 밀양 단장면 범도리에 있는 조선 영조조의 산림처사 반계(盤溪) 이숙(李潚·1720-1807)이 지은 정자 반계정(盤溪亭)을 찾았다. 반계를 존경하는 손사익(孫思翼)과 신국빈(申國賓), 안인일(安仁一) 등의 명사들과 어울리며 허물없이 지냈다. 반계정 주변 남쪽 들판의 벼향기 '남교도향(南郊稻香)'과 북벽의 기이한 암석 '북벽기암(北壁奇巖)', 앞 시내의 달그림자 '전계인월(前溪印月)', 옛 성의 낙조 '고성낙조(古城落照)를 비롯한 열두 곳의 승경을 '반계정 12경'이란 시로 지어 남겼다.
 영천의 횡계구곡에 있는 조선 숙종 때의 문인학자 훈수 정만양(鄭萬陽·1664-1730)과 지수 정규양(鄭葵陽·1667-1732) 형제가 지은 옥간정(玉磵亭)도 찾았다. '공경히 차운하다'란 시를 남겼다. "속세 떠나 유장에서 분진을 받지 않고/ 뭇 산들에 둘러싸인 푸른 곳을 인도했도다./ 서책을 갖고 공부하러 모여 와서/ 경륜은 잡지 않고 성할 때를 화답했네./ 옛 동네에 꽃이 날리니 손님을 끄는 것 같고/ 앞 시내에 비가 오니 머문 사람 풀어주네./ 창에 들어온 숲 경치를 진실하게 완상하며,/ 선생은 풀빛 띠고 봄날을 소요하네."
 
# 불혹에 낙향 후학기르며 시회(詩會) 열어
남경희는 조선 영조 24년(1748년)에 태어나 순조 12년(1812년)에 세상을 떠났다. 본관은 영양(英陽). 자 중은(仲殷). 호 치암(癡菴). 할아버지는 국선(國先)이고, 아버지는 용만(龍萬)이며, 어머니는 유의건(柳宜健)의 딸이다.
 8세 때에 '십구사략(十九史略)'을 읽고 비평하는 재능을 보였다. 영남학파의 거유(巨儒)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의리에 투철하여 '근사록(近思錄)'과 '맹자의난(孟子疑難)'을 즐겨 읽었다.
 정조 1년(1777년)에 왕의 즉위기념 증광문과에 급제했다. 벼슬은 승문원 박사와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병조좌랑을 거쳐 사간원 정언에 이르렀다. 주요 직책을 거치며 벼슬길에서 한창 잘 나가는데도 43세 때인 정조 15년(1791년)에 사직하고 고향인 경주(慶州) 보문리에 돌아왔다.
 자신을 중국 북송(北宋)의 유학자 소강절(邵康節·1011-1077)에 비유하며 정범조(丁範祖)와 이익운(李益運) 등 여러 사람이 벼슬길에 계속 나갈 것을 권유하는 것도 뿌리치고, 영호(影湖)에 지연계당(止淵溪堂)을 지어 후학들을 가르쳤다. 이만운(李萬運)과 이기경(李基慶), 이우(李瑀), 한치응(韓致應) 등과 친교가 깊었다. 봄, 가을에는 글벗들과 강회(講會)를 열면서 유유자적했다. 자연을 벗 삼아 산 까닭에 집안은 가난하여 끼니를 걱정할 정도였다.
 그의 아호 치암(痴菴)에 얽힌 일화(逸話)과 전한다. '어느 날 독서를 하고 있을 때 부인이 곁에 와서 양식이 떨어졌다고 했으나 묵묵부답이었다. 부인이 또 집안 일을 상의해도 응답하지 않았다. 다섯 살 어린 딸이 그것을 보고 어머니에게 왜 못난 사람과 말하느라 고생하느냐고 하자, 자기도 모르게 실소(失笑)했다. 그 뒤 집안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면서 민생과 세도를 걱정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라 하여 호를 치암이라고 했다'고 한다.
 저서로는 12권 6책의 시문집 '치암선생문집'이 전한다. 철종 11년(1860년)에 아들 기양(驥陽)이 편집·간행했다. 서문은 없고, 책 끝에 외손 이종상(李鍾祥)의 발문이 있다. 시 370여 수(首)와 서(書) 50편(篇), 기(記) 29편, 논(論), 설(說), 부(賦), 소(疏) 등이 실려 있다. 부(賦)의 '산중사(山中詞)'에는 젊은 날 산중에서 공부하던 시기에 겪었던 희로애락이 기록돼 있다. 소의 '청사선생승무소(請四先生陞疏)'는 퇴계학통의 김성일(金誠一)과 유성룡(柳成龍), 정구(鄭逑), 장현광(張顯光)의 도덕과 문장이 선현들에 뒤지지 않음을 강조하며 문묘 종사를 청한 글이다.

 

 

# 은거하는 삶 그린 유유자적 詩 남겨
그의 시는 벼슬길을 거부하고 은거하는 이의 유유자적한 삶을 노래한 것이 많다. '어부사(漁父詞)'와 '유거만흥(幽居漫興)' 등이 대표적이다. 그런가하면 '추일(秋日)'과 '춘일즉사(春日卽事)', '한식후즉사(寒食後卽事)' 등의 작품에는 계절의 변화에 민감한 시인의 지성이 잘 함축돼 있다. 사물의 묘사가 뛰어난 작품으로는 '망부석(望夫石)'과 '영경(詠鏡)','양류(楊柳)' 등이 꼽힌다.
 국토산하를 즐겨 찾은 자유인답게 명산고찰을 유람하면서 지은 시도 남겼다. '불영사(佛影寺)'와 '안국사(安國寺)', '대흥사(大興寺)' 등의 작품에서 적요한 산중생활이 일깨워 주는 참삶의 가치를 예리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런 한편으로는 그의 향리 경주의 옛 번성을 못내 잊지 못한다.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신라를 회고하며[東都懷古]'란 시에서 그리고 있다.
 <반월성가에 가을 풀 우거지고/ 금오산 위로는 저문 구름 지나간다./ 가련하구나, 망한 나라 천년 한이/ 나뭇꾼 아이 한 곡조 노랫 속에 들었구나. (半月城邊秋草多/ 金鰲山上暮雲過/ 可憐亡國千年恨/ 盡入樵兒一曲歌)>

 그의 은거생활은 특별난 일이 아니었다. 해가 돋으면 일어나고 달이 솟으면 잠자리에 드는 그런 편안한 삶을 지향했다. 바람 불면 부는대로 비 오면 오는대로 맞이하고 보내는 그냥 그대로 무심한 듯 지내는 자연스러운 세상살이에 만족했다. 그의 산천유람도 그런 생활의 연장이었을 뿐이다. 그가 언양의 작괘천(酌掛川)을 찾아 지은 시에서 그의 담백하고도 중후한 마음자리를 엿볼 수 있다. 울산대학교 성범중 교수의 '한시 속의 울산 명소'에 실려 있다.
 

 

   
▲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자신의 이름과 한시 등을 남겨놓은 작괘천 바위.

 <이곳에는 유람객이 많이 지나갔는데/ 넓고 아득한 남은 자취에서 신선들을 말하네./ 모래는 깎인 곳을 메워 온통 드러남을 꺼려하고/ 물은 소리 나는 것을 감싸 흐르지 않으려 하네./ 조물주는 누구를 위해 교묘하게 쪼고 새겼는가?/ 고상한 사람은 예로부터 맑고 그윽함을 주관하였네./ 산림은 인가가 가까워도 무방한데/ 귀를 씻는 데 어찌 반드시 허유(許由)를 배우리요? '저녁에 작괘천을 찾아가서 소봉의 시에 차운하다[暮過酌掛 次小峯韻]'> 부귀와 영화를 멀리 하기 위해서는 결코 유별난 행동이 필요하지 않음을 잘 설명하고 있다. 그의 조용한 은거생활의 참다움을 은연중에 나타내고도 있다. 오늘날의 우리 삶에도 그것보다 더 진솔한 교훈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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