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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하고 다정한 감성으로 한 시대 풍미한 선비
[울산땅 옛글 향기] 17.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
2011년 11월 08일 (화) 18:02:16 김종경 kimj@ulsanpress.net
   
▲ 정유길은 중종과 인종, 명종, 선조 네 임금을 모신 조선 중기의 문장가이자 정치가였다. 그는 바쁜 업무 틈틈이 산수 유람을 즐겼다. 경상도 관찰사로 재직하면서 울산과 언양에도 들러 두 고을의 풍광을 그린 서경시를 지었다. 사진은 처용암.

"한 해가 후딱 지나 추분이 되니,/ 찬 못에 연꽃 지고 국화는 향기 풍긴다./ 서쪽 이웃께서는 한가로운 풍치 넉넉하여/ 누런 곡식으로 갈라진 들판을 누워서 보신다더군요." 추분에 진 연꽃과 천지간에 향기를 풍기는 국화꽃을 완상하는 한편, 가을걷이를 앞둔 들판의 풍성한 곡식을 바라보면서 유유자적하는 옛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여유로움이 한껏 묻어 나는 정유길(鄭惟吉)의 가을을 그린 서경시다.

#경상관찰사로 울산 언양 들러
맑고 고운 가을빛이 완연하던 그 추분도 지나고, 가을도 이제 끝물이다. 달랑 두 장의 달력만 남았다. 한 해가 너무나 빠르게 후딱 지난다. 옛 사람들은 절기의 변화를 느긋한 마음으로 맞고 보냈다. 낮과 밤이 팽팽히 맞서던 추분이 지나면 어둠이 성큼성큼 다가와도 결코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우주의 질서에 따라 계절은 늘 순환하기 마련이지 않은가. 가을이 가고 겨울이 가면 봄이 다시 오지 않는가. 인생을 바삐 갈 일도 아니고, 아등바등 살 일도 결코 아니다.

 정유길이 노년에 한강변 두모포(豆毛浦)의 동호(東湖)에 몽뢰정(夢賚亭)이란 정자를 지어 여생을 즐기면서 이른 봄날 춘첩을 쓴 정경을 읊은 '몽뢰정춘첩(夢賚亭春帖)'이란 시를 보면 삶의 여유로움과 편안함을 읽을 수가 있다. "백발의 선왕(先王)을 모시던 늙은 판서가/ 한가히 분수 지켜 편안히 살아가네./ 늙은 어부가 봄 강물이 풀렸다고 알려주니/ 꽃이 아직 피지 않았지만, 쏘가리 잡이 나간다오." 안빈낙도의 삶이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훌훌 벗어나고자 하는 게 아닐까.

 뛰어난 시재(詩才)를 지닌 정유길은 장년의 나이에 경상도 관찰사로 재직하면서 울산과 언양에도 들렀다. 두 고을의 풍광을 그린 서경시를 지었다. 그의 문집 '임당유고(林塘遺稿)'의 제영록(題詠錄)에 실려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조선군이 쌓았던 서생 만호진성을 그린 '서생포(西生浦)'란 시를 남겼다. 울산대학교 성범중 교수가 지은 '한시 속의 울산산책'에 소개돼 있다. "무궁화와 누른 대나무는 산성을 둘렀는데/ 그윽한 십리 길을 구불구불 꺾어지면서 가네./ 서생포의 봉후가 고요한 게 가장 좋으니/ 밤에 창으로 바다 물결소리를 들어야 하리."

 지금의 울주군 진하리, 서생포에 무궁화와 누른 대나무로 둘러진 산성인 만호진성이 있었다. 상당히 높은 곳에 있어 구불구불한 십리 길을 가야 성에 닿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이어서 시를 지은 정유길은 고요한 봉후를 보면서 밤 창문을 통해 들리는 바다의 물결소리를 들어야겠다는 뜻을 담았다. 이처럼 평화로운 서생 만호진성은 왜란을 거치면서 안온하게 유지되지 못하고 결국 살벌한 전장으로 변했고, 종내에는 왜군이 허물어 성돌을 왜성을 쌓는데 사용했다.
 
# 이조판서 8번 예조판서 9번이나 지내
정유길은 중종과 인종, 명종, 선조 네 임금을 모신 조선 중기의 문장가이자 정치가였다. 중종 10년(1515년) 서울에서 강화부사를 지낸 아버지 복겸(福謙)과 어머니 전주이씨(全州李氏) 사이에서 태어나 선조 21년(1588년) 9월에 74세로 눈을 감았다.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길원(吉元). 호는 임당(林塘).

 할아버지 광필(光弼)이 영의정을 지냈고, 훗날 아들 창연(昌衍)이 좌의정, 증손 태화(太和)가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외손자가 나중에 서인 정권의 거두이자 조선 말에 세도정치시대를 연 장동김씨의 선조인 김상헌(金尙憲)·김상용(金尙容) 형제이다.
 중종 26년(1531년) 17세에 사마시에 합격한 뒤, 중종 33년(1538년) 24세에 별시문과에 장원하여 중종의 축하를 받고 곧 정언에 올랐다. 이조좌랑과 세자 시강원 문학 등을 역임했다. 중종 39년(1544년) 이황(李滉), 김인후(金麟厚) 등과 동호(東湖)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이조정랑과 직제학 등을 거쳐 명종 7년(1552년)에 도승지가 됐으며, 그때 이황과 성학(聖學)을 진흥시킬 것을 진언했다. 이조참판과 대사간, 예조판서 등을 지낸 뒤, 명종 15년(1560년) 대제학이 돼 문형(文衡)에 들어갔다.
 
# 시 500여편의 문집 '임당유고'
   
▲ 정유길이 남긴 문집 '임당유고'

선조 1년 (1568년) 경상도와 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하면서 옥사(獄事)를 바로잡고, 민생안정에 힘썼다. 이조와 예조, 병조판서를 거쳤다. 한 차례도 지내기 어려운 이조판서를 여덟 번, 예조판서는 아홉 번을 지냈다.
 선조 14년(1581년) 우의정이 됐으나, 사헌부의 탄핵으로 사직했다. 2년 뒤 우의정에 복귀했고, 이듬해 궤장이 하사돼 기로소에 들어갔다. 선조 18년(1585년) 좌의정이 됐다. 노년에 한강변 지금의 서울 성동구 옥수동인 두모포(豆毛浦)의 동호(東湖)에 몽뢰정(夢賚亭)을 짓고 여생(餘生)을 즐기다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충효와 근신을 근본으로 삼았으며, 천성이 모나지 않고 처신이 신중하며 넓은 도량을 가져 포용력이 강했다. 일에는 대의를 갖고 과감하게 처결했다. 시와 문장에 뛰어났고, 서예에도 능하여 송설체(松雪體)로 유명했다. 그래서 그의 호를 딴 임당체(林塘體)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문집으로는 2권 2책의 '임당유고(林塘遺稿)'가 있다. 시가 500여편으로 대부분을 차지하고, 문 5편과 표전 5편 등으로 짜여져 있다. 사후 4년 뒤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많은 작품이 유실된 것을 아들 광성(廣成)이 모아 간행하려 했으나 이루진 못한 것을 증손 태화(太和)에 의해 인조 16년(1638년)에 간행됐다. 문장가 신흠(申欽)과 외손 김상헌(金尙憲)이 서문을 썼다.
 
# 격조·운율 어우러진 시 남겨
그의 시는 후대 평론가로부터 청화 담려(淸華瞻麗)하면서도, 격조(格調)와 운율(韻律)이 어울려서 모두 도리(道理)에 맞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화정[永柔梨花亭]'이란 시를 보자. "지는 꽃은 비바람 때문이란 옛 사람 시에도 있듯이/ 올 봄이 되어서는 꽃도 교묘히 늦게 피려하는구나./ 꽃피는 시절이 되면 응당 달도 떠오르려니/ 그 속의 봄빛을 자규는 알리라."

 그가 살던 서울 회현동의 풍광을 그린 시를 보자. "그대의 한가한 성미 세상사 다 버리고/ 남산으로 찾아들어 오솔길 넓혔네./ 바위와 골짜기 형편 따라 집 지으니/ 앉으나 서나 모두가 못이오 정자라네./ 물 따라 올라가니 꽃이 물에 떠오고/ 폭포 찾아 들어가니 이끼 위에 발자국나네./ 하늘에 솟은 동쪽 언덕 더욱 좋은 곳이/ 달 밝은 밤 그대와 함께 이리저리 거닌다네."

 울산의 개운포의 모습을 읊은 시 '개운포(開雲浦)'를 보자. 울산광역시가 펴낸 한시선집 '태화강에 배 띄우고(송수환 번역)'에 실려 있다. "신라 왕 오시던 날 구름 걷혔던 개운포/ 천년 뒤에 온 사절은 군사를 점고(點考)하네./ 땅에 꽂힌 원수 깃발, 멀리 시야를 가리는데/ 살며시 부는 바람에 잔 물결이 이는구나."
 '언양 객사에서[題彦陽客舍]'란 시도 보자. "천리를 내려 온 관풍객(觀風客)이/ 삼년동안 시골 사람만 보는구나./ 흰 머리 늙은이가 상기도 죽지 않았으니/ 도라지꽃 장미꽃 피는 봄날 구경 하자구나." 하나같이 그의 빼어난 시재를 엿보기에 충분한 가작(佳作)이다.

 그는 바쁜 업무 틈틈이 산수 유람을 즐겼다. 그의 산천 풍광을 그린 서경시는 유람의 산물이었다. 경상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민정을 보살피는 짬짬이 명승지를 찾았다. 그의 문집의 제영록(題詠錄) 산수를 유람하면서 지은 시들이 실려 있다.
 울산의 '개운포'와 '서생포', '언양 객사에서'란 시 역시 제영록에 실려 있다.
 그 외에도 경상도 관찰사 재직 때에 찾은 '해운대(海雲臺)'와 월영대(月影臺)', 몰운대(沒雲臺)' 합천(陜川) 등지를 읊은 시도 제영록에 수록돼 있다. 모두가 그의 풍광을 바라 보는 뛰어난 안목과 섬세하고도 다정다감한 감성이 한껏 승화된 작품들이다.

# 선비의 도리·책임의식 시로 승화
그는 선비로서의 도리와 책임의식을 승화시킨 시도 썼다. '임금이 내린 제사[賜祭棘城]'란 시를 보자. "조정의 마른 뼈도 임금의 은혜에 젖고/ 향불이 해마다 차가운 담에 내린다./ 제사를 마치고 단위에 오르니 비바람도 멎고/ 흰 구름은 바다와 같이 앞마을에 가득하다."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선비의 표상으로 재야 사림으로 평생을 보낸 남명(南冥) 조식(曺植)도 그에게 헌시(獻詩)를 지어주었다. "그대는 북쪽으로 돌아가는데/ 산 자고새인 나는 남쪽에 사네./ 정자 이름을 산해(山海)라고 했더니/ 바다의 학이 뜰로 찾아와 전하네."라는 '판서 정유길에게 주다[贈鄭判書惟吉]'란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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