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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의 백련정 모습. 한실골 9곡 중에 상류에 위치해 사철이 아름다웠던 백련정은 대곡댐 건설로 두동 봉계로 옮겨졌다. 울산신문 자료사진

근래 울산에 둘레길을 만들면서 별 다른 역사적인 뜻도 없는 곳에 정자를 지었다. 그러면서도 지난 역사문화의 발자취를 더듬을 수 있는 옛 정자에는 너무나 무심하다.
 고건축물관련 자료를 보면 울산엔 1940년 이전까지만 해도 무려 60여곳의 정자가 있었고, 현재 15곳이 남아있다고 한다.
 가장 먼저 지어진 것은 1662년에 건립된 이휴정(李休亭)의 전신 이미정(李美亭)이다. 2005년에 새로 지었다.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호.
 그 뒤를 이어 집청정이 1600년대 후반기에 반구대 마을에 들어섰다. 재천정과 관서정과 백련정과 입암정과 해은정과 활천정과 능산정사와 송애정사와 거경재와 양정재와 옥오정과 작천정과 효사정이 잇따라 세워졌다. 거의가 태화강과 회야강변이라는 최적의 입지에 자리잡았다. 선조들의 터 잡기의 탁월함을 엿볼 수 있다.


 상당수 정자건물이 중병에 걸려 있다. 작천정은 원형이 바뀐지 오래인데도 고칠 뜻이 없는 듯 하다. 백련정도 제 자리를 떠나면서 옛 모습이 변했다. 송애정사는 심하게 낡아 여러 곳이 허물어졌다. 집청정이라든가 재천정 등은 그나마 나은 편이지만, 소유자들의 힘만으로 유지보수에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다.
 현재 남아 있는 자료에는 이미정(李美亭)이 가장 먼저 지어진 것으로 돼 있지만, 고려 후기에 울주군수로 재직한 정포가 삼산의 '벽파정(碧波亭)'을 읊은 시를 보면 그 이전에 이미 벽파정이 있었다고 했다. 정포가 울주군수로 있었던 당시에는 퇴락한 것으로 돼 있다. 정포는 벽파정을 비롯한 울산의 승경 여덟 곳을 가려서 '울주팔영' 시를 지었다. 정포의 시 '벽파정'은 다음과 같다. 울산대 성범중 교수의 저서 '울산지방의 문학전통과 작품세계'에 실려 있다. "쌓인 돌은 가을 언덕에 기대었고/ 대나무 떨기는 저녁 물가에 누워 있네./ 뱃사람은 여기가 벽파정이라 하는데,/ 비석은 깨어지고 명문은 이미 없어졌네./비가 지나가니 모래 흔적은 희어지고/ 연기가 스러지니 물빛이 푸르네./ 당시의 노래를 차마 들을 수 없어/ 돛대에 기대어 부질없이 눈물 흘리네."


 벽파정이 있었던 삼산은 현재 학성교 남쪽의 아데라움 아파트 부근에 있었던 산이었다. 풍광이 빼어난 곳이어서 벽파정 외에도 이수삼산정(二水三山亭)과 구암정(龜岩亭) 등의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태화강의 지천 중에서 가장 긴 대곡천변의 절경에는 정자가 잇따라 들어섰다. 특히 반구대 주변이 그랬다. 울산의 옛 정자 가운데 가장 원형이 보존되고 있는 반구대의 집청정(集淸亭)을 읊은 조선 후기의 문인 최종겸(崔宗謙)의 시를 보자. "소나무와 대나무가 뜰에서 뒤섞여 푸르고/ 시원한 바람은 사방에서 부네./ 밤에는 청아한 뜻이 넉넉한데/ 밝은 달은 매화가지 위로 떠오르네."
 집청정 근처 반구서원 뒤편에는 울산 출신의 문인 이정혁(李正赫)이 1920년 무렵에 포은 정몽주를 흠모한다는 뜻을 담은 '모은정(慕隱亭)'을 지었다.
 반구대 앞을 흐르는 대곡천 상류 두동 천전리 방리마을에는 백련정(白蓮亭)이 있었다. 최남복(崔南復)이 정조 8년(1784년)에 정자를 지어 백련서사라고도 하고, 후학양성에 힘썼다. 수옥정(漱玉亭)이라고도 했다. 백련정은 대곡댐이 만들어지면서 두동 봉계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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