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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석총은 흙으로 봉분을 만드는 흙무덤과는 달리 돌을 쌓아 봉분을 만드는 분묘 형식을 말한다. 적석총 하면 고구려 무덤을 연상 하지만 이미 6000여년 전인 홍산문화 때부터 시행 되어 오던 묘제이다. 적석총에는 괴석분(塊石墳)과 절석분(切石墳)의 두 종류가 있다.
괴석분은 사람의 머리만한 돌로 무질서 하게 쌓아서 봉분을 형성한 것인데 반해, 절석분은 그 보다 큰 돌을 네모로 깎아서 정연 하게 쌓아 올리는 방식이다.

# 중앙아시아보다 더 빨라 시원으로 봐야

   
▲ 홍산문화의 대표적 유적으로 꼽히는 요령성 우하량 유적지 제2지점 적석총 발굴현장. 이곳에는 적석총과 함께 대형제단도 발견됐다.


적석총은 한반도에도 나타나는데 충북 단양, 경북 의성 지방 등지에 괴석분이 있고 울산에는 은현리 적석총이 대표적인 괴석분이다. 절석분은 만주 집안현의 장군총이 있다. 한편, 서울 석천동 한강변에는 기단을 축조 하고 계단식으로 쌓아 가운데 시체를 안치 했는데 이는 백제 초기의 적석총으로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 지고 있다.
 울산 은현리 적석총도 고구려와 유관한 것으로 보고 있는데 고구려의 신라 섭정시 가야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고구려 원병의 장군급 무덤이 아닌가 보고 있다. 은현리 적석총에 고구려계 기와 조각이 무수히 발견 되고 있어 이를 뒷받침 하고 있다. 집안의 장군총과 호태왕릉에도 상부에 일정한 건축물 흔적이 있어 기와편이 무수히 발견 되고 있다. 이러한 적석총의 시원은 홍산문화에 두고 있다. 홍산문화( BC 4500~3000)-부여-고구려, 백제로 이어지면서 적석총은 우리 민족과 직접적 연관성을 가져 왔다.
 
# 대형제단, 여신묘와 더불어 홍산문화 대표
홍산문화는 그 대표적인 유적이 세 가지로 요약 되는데,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제사를 지내는 대형 제단(祭壇), 여신을 모시는 사당인 여신묘(女神廟), 돌을 쌓아 만든 적석총(積石塚)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적석총은 홍산문화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 홍산문화의 주인공들이 고수한 묘제이다. 홍산문화가 연구되기 전에는 적석총의 기원을 알타이산맥을 중심으로 한 중앙아시아 초원지대로 알려졌으나 홍산문화의 적석총 발견으로 중국 내몽고 자치구 요하(遼河) 유역의 적봉(赤峰) 일대로 보고있다. 그 이유는 시기적으로 적어도 1000년 이상 앞서고 있기 때문이다.

 

   
▲ 우하량 제2지점 1호묘에서 출토된 곰 머리에 용의 형상인 옥웅룡 옥기.

 

   
▲ 요령성 우하량 유적 포지석. 이곳에 20여기의 적석유구가 있다.


 

# 우하량 유적 16곳중 13곳이 적석묘
홍산문화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요령성 우하량(牛河梁)에 대표적인 적석묘군이 있다.
 우하량의 적석총은 부서진 돌을 사용해 쌓은 수 십 개의 돌무지인데 묘장 중심에 있는 방형의 돌무덤은 이미 도굴된 상태이다. 주위에는 작은 돌무덤들이 있는데 지금 까지도 유골이 그대로 보존 되어 있는 곳도 있다. 우하량 유적 16개 지점 가운데 13곳이 적석총이다. 이 가운데 가장 주목을 받는 곳은 제2지점의 적석총이다. 이곳의 가운데 조성된 적석총은 동서 17.5m, 남북18.7m의 방형으로 3층 계단식 적석총이다. 적석총 안에는 석곽을 놓았고, 그 안에 석관을 조성 했다. 석관 안에는 성인 남성의 인골과 홍산문화 옥(玉)의 대표격인, 곰의 머리 형태와 용(龍)의 모양을 결합한  옥웅룡(玉熊龍)이 확인됐다.

 
# 계단식 형태 고구려-백제로 이어져

   
▲ 요령성 우하량 제2지점 적석총 4호묘의 발굴현장. 이곳에서는 말굽형 등 옥기 3점이 발견됐다.


대형 적석총은 양 옆으로 원형 제단과 거대한 적석 유구를 거느리고 있다. 이런 계단식 적석총의 전통은 훗날 고구려, 백제 적석총으로 이어진다. 돌로 쌓은 유구 안에는 무려 26기의 크고 작은 석관이 나란히 놓여있었다. 순장(殉葬-지체 높은 사람이 죽었을 때 신하나 종, 또는 아내를 산 채로 함께 장사 하던 일)의 흔적도 보이는데 순장은 상(은)나라와 부여로 이어지던 장례 풍습이다.
 가운데 대묘(大墓), 즉 대규모 적석총은 수장급의 무덤으로 짐작되며, 적석 유구 속에 조성 된 26기의 무덤은 씨족사회 구성원들이 계급별로 묻힌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적석총과 함께 마련된 제단은 홍산인들이 지모신과 조상신을 모신 증거이기도 하다.
 중국 학계는 이러한 대규모의 계단식 적석총을 보고 홍산인들이 일찍이 신분과 계층이 뚜렷한 진보된 사회를 영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미 단순한 씨족사회를 넘어서 국가체제에 진입할 단계라 할 수 있다.
 홍산문화의 유적에서 발굴된 무덤의 형태는 동일하지 않다. 이는 무덤들이 만들어진 연대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큰 무덤과 작은 무덤의 또 하나의 차별성은 수장품에서 현저히 드러난다. 우하량 적석총의 어떤 무덤은 부장품이 전혀 없거나 소량의 부장품만 있는 반면, 어떤 무덤에는 말발굽 모양 머리꾸미개, 구름형의 옥패(玉佩), 곰 머리 모양과 용 모양을 결합한 옥웅룡(玉熊龍)등 고급스러운 옥기(玉器)들이 부장되어 있기도 하다.
 
# 남성주도 사회 풍습 그대로 반영

   
▲ 홍산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울산 웅촌 은현리 적석총.


우하량 적석총의 부장품들은 모두 옥기에 속하고 옥 이외의 부장품은 발견 할 수 없다. 이것이 우하량(홍산문화) 유적의 또 다른 특색이라 하겠다. 중심에 있는 큰 무덤들은 모두 남자의 무덤으로 밝혀졌다. 무덤이 크고 좋은 위치를 점유하고 많은 부장품(옥기)을 보유 한 것은 남성만이 누린 특권이었을 것이다.
 사후(死後) 묘장의 차이는 생전 존비(尊卑)의 차별을 나타낸다. 따라서 남자의 무덤이 크고 부장품도 많다는 것은 당시 남성의 지위가 원시 모계 중심을 벗어나 남성 주도의 사회였음을 엿볼 수 있다. 비교적 분명한 등급 관념이 성립되었으며 원시적인 예의제도가 사회관계를 유지시키는 끈으로 이미 작용했음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또 하나 짚고 넘어야 할 것은 우하량 적석 무덤군과 건축물들은 대면적(對面積)의 지상에 석재 건축이 일정한 수준에 도달했음을 설명 하고 있다. 대면적의 총체적 계획이 있었을뿐만아니라 건축물의 배치가 철저한 설계에 의해 시행되었다는 것이다. 적석총과 건축물의 거대하고 복잡한 공정, 그리고 유지와 개수(改修)등은 일률적인 감독을 받았을 것이며 엄격한 조직과 숙련된 기술자(匠人)가 주축이 되어 작업을 진행 했을 것이다.  

# 한 변이 100m인 7층의 피라미드

   
▲ 제13지점 동방의 피라미드 복원도. 7층으로 조성된 피라미드는 왕급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


우하량(牛河梁) 적석묘군에서 남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전산자(轉山子)에는 '동방의 피라미드'라 일컫는 대형 적석총이 있다. 중국에서는 이를 '진쯔타' 즉 금자탑(金字塔)이라 부를 만큼 신비의 수수께끼 무덤으로 보고 있다. 한변의 길이가 60m에 이르는 장방형의 적석묘인데 잇대어 축조한 제단까지 합하면 세로변은 100m에 이른다. 지금까지 확인된 것은 7층의 대형 계단식 무덤이다. 가운데는 판축의 형태로 흙을 다지고 바깥쪽은 돌로 쌓았다. 다진 할석의 면은 바깥으로 하고 무너지지 않도록 견치석과 엇박자로 쌓은 석축의 방법은 후대에 고구려로 이어지고 있다.
 
# 울산 은현리 적석총까지 이어져

   
▲ 1992년에 확인된 제13지점 동방의 피라미드. 아직 정식 발굴이 이뤄지지 않았다.


중국 학자들은 이 적석총을 왕급(王級)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피라미드는 이집트 사카라에 있는 제2왕조 파라오인 조세르(BC 2630~2612)의 계단식 피라미드와 메소포타미아 우르 지역의 피라미드(BC 2600~2500)이다. 그러나 홍산문화의 피라미드는 이보다 1000년 앞선 시기의 것이다. 홍산문화가 다른 세계 문명에 결코 뒤지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피라미드식 적석총은 중국 중원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중원 가까운 곳, 하북성 위쪽인 영하회족 자치구 은천에 있는 서하 왕국의 왕릉에서 흙벽돌로 쌓은 피라미드식 묘를 볼 수 있다. 거기에는 황토고원이라 돌이 귀하니까 흙으로 피라미드를 쌓았다. 그쪽 사람들 역시 홍산문화와 연결 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홍산문화의 묘제는 수천년이 지난 후에도 고구려,백제로 이어지면서 한반도에도 흔적을 남겼다. 울산 은현리 적석총도 거슬러 오르면 홍산문화로 이어진다. 묘제는 민족에게 고유의 풍습을 잇게 했다. 그것은 어느날 갑자기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장구한 세월 동안 살아오면서 민족 고유의 방식을 터득하며 지혜를 발휘 한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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