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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분이 산으로 형성된 거제도 크기 2배의 섬

대마도는 동서 18km, 남북 82km의 가늘고 긴 모양을 하고 있다. 거제도 2배 면적이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이마저도 90%가 산림으로 뒤덮혔다.
 안내책자를 펼쳐보지 않아도 될 만큼 이동하는 길 곳곳이 절경이다. 산과 바다가 어울린, 자연 그대로의 모습. 발전은 최소한도로 진행됐다고 표현하면 되겠다. 아니, 산지가 대부분인 이곳을 개발한다는 생각 자체가 어리석을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심심하다는 느낌이다.


▲ 이예 선생의 공적비가 세워진 원통사(엔쓰지). 원통사가 위치한 사카 지역은 14세기 대마도주가 머물면서 번창했던, 대마도 정치의 중심지였다. 조선에서 온 통신사가 대마도에 도착했을 때 머물렀던 것처럼 울산이 낳은 조선 최고의 외교관, 이예 선생 또한 이곳에 머물렀다. 공적비는 지난 2005년에 선생의 후손들이 세웠다.


 이곳 대마도는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도시'다. 6개의 '구'로 이뤄졌는데, 이즈하라마치ㆍ미쓰시마마치ㆍ도요타마마치ㆍ미네마치ㆍ가미아가타마치ㆍ가미쓰시마마치로 구성됐다. 섬에서 가장 번화한 지역, 이즈하라를 하루 만에 둘러보았는데 다른 지역이야 말해서 무엇하랴.
 눈앞에 펼쳐진 거라고는 사막뿐인 - 간간히 작은 마을이 있는 - 미 중부지역을 이동하는 것처럼, 그렇게 버스를 탄 채 눈을 감았다.
 
# 삼국시대부터 조선까지 이어온 노략질

왜구라고 표현하면 되겠다. 적게는 수십 척, 많게는 수백 척에 이르는 배를 몰고 다니며 우리나라를 침략, 물자와 사람을 노략질해가던 일본인 해적을 우리 조상들은 '왜구'(倭寇)라 불렀다.
 "내가 죽으면 호국용(護國龍)이 되어 왜적을 막겠으니 바다에 묻어 달라"고 했다는 신라 문무왕(文武王)의 유언이 입증하는 바와 같이, 왜구의 침입은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있어 왔다.

 문제는 유라시아 대륙을 정복한 몽골의 지도자 쿠빌라이(칭기즈칸). 고려와 화의를 맺은 후 일본을 손에 넣기 위해 만들어진 여원 연합군은 1274년 10월 5일 대마도에 닻을 내린다. 당시 대마도 전체 인구와 비슷한 병력의 연합군 2만 8,000여명 앞에 대마도 도주, 소 스케쿠니와 80기에 불과한 병력은 처참하게 무너져버린다.

 대마도를 거쳐 일본에 쳐들어갔으나 태풍으로 크나큰 손실을 입고 되돌아간 여원 연합군. 이후 한번 더 일본 정복에 나서지만 또다시 '카미카제'(神風, 신이 내린 바람)로 인해 실패하고 만다. 그 이후부터다. 16세기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해안 등지를 침입해 쉴 새 없이 노략질을 한 왜구가 기승을 부린 게 말이다.
 
▲ 통신사 이예 공적비.


# 아전에 외교전문가로

대마도가 왜구의 소굴이 된 원인 중 하나는 '먹고살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두 번에 걸쳐 침략한 고려로 인해 끊겨버린 우호관계. 넘치는 원한에 더해 먹고살기 위해서, 왜구는 우리나라를 습격했다.
 수십 척의 배 안에 가득한 왜구가 해안 마을을 침략하면 그 마을의 닭과 개를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모든 걸 쓸어 담았다. 그 횟수는 점차 증가했으며, 어느새 해안 마을을 넘어 내륙 깊숙이 쳐들어오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예 선생이 태어난 해인 1373년을 전후해 왜구의 침입은 극심해진다. 공민왕(재위 1351~1374) 때는 115건, 우왕(재위 1374~1388) 때는 378건에 이르게 된 것.
 8살인 1381년 때의 일이었다. 당시 울산군에 들이닥친 왜구로 인해 마을은 쑥대밭이 된다. 무엇보다도 이예 선생은 어머니가 왜구의 손에 의해 납치당하는 아픔을 겪게 된다.

 시간은 흘러 그의 나이 24살인 1397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선 지도 5년째. 당시 선생은 울주 관아에서 하급 관리에 지나지 않는 아전에 불과했다. 그러던 중 울주 군수가 왜구에 붙잡혀가는 일이 발생하는데 선생은 그들이 가는 길을 막는다. 자신의 군수를 위해 자진해서 나선 것. 그렇게 이들은 대마도 화전포에 억류당하는 처지가 되지만 이예 선생은 자신의 상전을 보필하며 맡은 바 임무를 다한다. 이듬해 풀려난 선생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아전 신분이 아닌, '대왜(일본) 외교관' 벼슬, 아니 직무를 평생토록 받게 된다.

 이예는, 들끓는 왜구로 고려의 멸망이 가속화하는 것을 지켜봤으며 이후 조선 세종 때에는 왜구의 소굴이었던 이곳 대마도를 교역의 기지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 1373년에 태어났으니 그의 나이 20살 때 고려가 멸망했으며, 그의 나이 71살 때 계해조약이 맺어졌으니 2년 후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왜구 및 왜인 그리고 대마도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어온 것이다.

▲ 오석에 새겨진 이예 선생의 삶과 업적.

 
#이예선생이 머물렀던 원통사

운전기사가 손짓으로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저기 보이는 절이 원통사인가보다. 역사적 사실을 모른다면 쉽사리 지나칠 절은 이곳 작은 마을과 한데 섞여 있었다.
 복층 구조인 원통사는 위쪽 터에 절과 범종이, 아래쪽에 비석 두 개가 있다. 저기 보이는 큰 비석이 선생의 후손들이 세운 '통신사 이예 공적비'다.

 이곳 원통사가 위치한 사카 지역은 14세기 대마도주가 머물면서 번창했던, 대마도 정치의 중심지였다. 조선에서 온 통신사가 대마도에 도착했을 때 머물렀던 원통사. 선생 또한 당연히 이곳에서 머물렀다.
 공적비 옆 오석에는 한일 양국의 언어로 선생의 삶과 업적을 새겨놓았다. 이국땅에 있는 울산 출신 이예 선생의 공적비를 보노라니 한편으로는 신기하고 또 한편으로는 자랑스럽다.

 조선왕조실록 등 한일 양국의 사료를 종합하면 조선 건국 후 세종대에 이르는 60여년 동안 48회에 걸쳐 왜에 사절을 파견하는데, 선생은 40여 차례에 걸쳐 대마도, 왜, 유구(오키나와) 등지에 사절로 다녀온 걸로 기록돼 있다. 태종과 세종 때 부각되는 그의 업적. 그중 많은 부분이 이곳 대마도와 관련이 있다.

 세종 1년인 1419년 6월, 잠잠하던 대마도 왜구들이 또다시 노략질을 일삼자 태종이 단행한 대마도정벌에 이예 선생은 참가하게 된다. 이전부터 자주 왕래했던 터라 해로에 익숙하고 또 대마도 상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마도정벌 성공의 선봉에는 선생이 있었다. 또한 정벌 성공을 계기로 조선은 왜와 관련한 외교 체제를 주도적으로 운영하게 된다.

 선생은 왜구에 끌려간 조선인들을 다시 데려오는 일에도 크나큰 역할을 한다. 총 667명의 조선인을 데려왔는데 이중 500명에 이르는 조선인을 이곳 대마도에서 구출했다.
 또한 오늘날의 VISA와 같은 도항증명서인 '문인' 관련 제도를 탄탄하게 다진다. 수많은 왜인이 조선에 입국, 혼란스러워진 왜인 관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마도에 파견된 이예 선생과 당시 대마도주의 제도 재구축으로 인해 통제할 수 있게 된다.
 
#한일외교관계 명문화

이예 선생은 '꽃'이 되었다. 몇 줄의 기록이 모이고 모여 선생은 21세기 현재, '외교관'이 된 것이다. 그의 활동으로 인해 조선과 왜의 관계는 바뀌고 또 바뀐다.
 어머니를 납치해간 왜구를 선생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군수가 왜구에게 잡혀갈 때 그는 어떤 생각으로 길을 가로막았을까? 이후 외교 관리가 되어 바다를 건널 때마다 어머니를 찾지는 않았을까?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이예 선생은 죽기 전까지 평화 체계를 유지하려 했다. 죽기 2년 전 71세의 나이로 대마도주와 계해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이 조약의 주요 내용은 대마도주에게 매년 얼마의 식량을 주고 대마도의 세견선(통교자가 1년 동안 파견할 수 있는 무역선)을 50척으로 제한하는 것. 또한 조선으로 도항하는 선박은 의무적으로 문인을 받도록 명시한다. 이렇게 외교관계를 명문화한 것이 그의 마지막 업적이었다. 이러한 일생에 걸친 선생의 노력으로 조선은 그의 사후 수십 년 동안 평화를 유지하게 된다.

 최근에 들어서야 역사 속에서 조명을 받게 된 이예 선생. 울산이 낳은 조선 최고의 외교관은 대마도 땅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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