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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산 문화는 그 대표적인 유적이 세가지로 요약 된다.
돌을 쌓아 만든 무덤인 적석총, 그리고 여러 사람이 모여 함께 제사를 올리는 제단(祭壇)과 여신을 모시는 사당인 여신묘(女神廟)이다. 제단과 여신묘는 모두 종교적 성격이 있는 조상 숭배, 또는 씨족 공동의 지모신에 대한 제의적 행사를 베풀던 성소(聖所)였다. 이것은 농경 및 정착 생활로 접어든 원시 사회에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신전이었을 것이다. 홍산문화 유적의 특징이 단(壇), 묘(廟), 총(塚)의 삼위일체인데 웬만한 대형 유적지에는 삼요소가 똑같이 나타나고 있다.
제단, 묘, 무덤의 출현은 홍산 문화 후기의 뚜렷한 특징이다. 이러한 제사와 관련된 건물터는 홍산 문화인들의 원시종교 활동 및 생산력의 수준을 검토 하는데 대단히 귀중한 실물 자료를 제시해 주고 있다.

 

   
▲ 홍산 문화는 그 대표적인 유적이 세가지로 요약 된다. 돌을 쌓아 만든 무덤인 적석총, 그리고 여러 사람이 모여 함께 제사를 올리는 제단과 여신을 모시는 사당인 여신묘이다. 사진은 초모산 적석총과 제사유적.

# 신석기 첫 원형·방형 제단
먼저 제단을 살펴보기로 하자. 홍산문화의 대표적인 제단은 동산취(東山嘴) 유적이다. 동산취 유적은 요령성 객좌현(喀左縣) 동남쪽 대릉하(大凌河) 서안에 위치하고 있는데 1979년과 1982년 두 차례에 걸쳐 발굴되었다.
 이 유적은 산기슭 정중앙의 완만하고 평평한 지역에 위치해 있다. 길이가 약 60m, 너비는 약40m이다. 유적지 아래에는 대릉하가 굽이쳐 흐르고 사방은 시야가 탁 트인 평지이다. 멀리 바라보면 뭇 산들이 제단을 감싸고 있어 기세가 웅장하다. 사방이 터진 산등성이 위에 마련된 이 제단은 사면팔방에 거주하던 원시부락 조직이 정기적으로 이곳에 와서 성대한 제사활동을 거행하던 장소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동산취 제사 유적의 규모와 건축술로 보아 자연숭배나 토템숭배의 저급한 단계를 벗어나 한 차원 높은 문명사회로 진입 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돌로 쌓은 이 건축 유적은 돌의 가공 기술과 축조술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바깥쪽에는 돌을 하나하나 교착시켜 쌓았고 기다란 기단석은 돌을 떼 내어 각 모서리가 돌출되어 있고 표면은 넓다.
 유적지 내부에는 하늘과 땅을 상징하는 원형 제단과 방형 제단이 있다. 이러한 형태의 유적은 동아시아 신석기시대 고고학 사상 처음이다.

#  홍산문화 영향 울산 신암리 비너스상
이곳에서 토기를 비롯해서 여러 가지의 토제 조소인상(造塑人像)이 출토 되었는데 이 가운데 소형 임산부는 나체형으로 머리와 오른쪽 어깨가 떨어져 나갔다. 배가 부르고, 왼쪽 손은 배 부위에 올려놓았다.  조상(造像)은 의식에 사용했던 다산 기원의 신물(神物)로 보고 있다. 이 비너스는 울산 신암리 출토 비너스와 유사한 성격인데 이는 이른 시기의 홍산 문화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소조상외에 석인상(石人像)도 더러 발견되고 있는데 2001년, 오한기(敖漢旗) 초모산(草帽山) 제사 유적에서 발견된 석인상은 사실적으로 표현된, 흡사 홍산인 모습의 조각품이다.
 이 또한 제사 의식의 신앙적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초모산 유적은 40미터의 낮은 구릉지대로 정남쪽 500m 앞에 노호산하(老虎山河)가 흐르고 있다. 홍산문화 제사 유적 앞에는 강이있기 마련이다. 제단은 3층으로 되어 있고 돌무덤도 발견 되었는데 원형제단 중간에 사각형의 대형 석관묘가 있고 불을 피운 흔적이 있다. 이것은 제사를 올릴 적에 불을 피운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도 홍산문화 유적지에는 수많은 제사유적이 있다. 이들 제단은 원형과 사각형이 있다. 원형은 하늘에 지내는 제단이고, 사각형은 지신(地神)을 위한 제단으로 보고 있다 홍산인들은 천신(天神)과 지신(地神)을 위해 돌로 제단을 쌓고 흙으로 다져, 신앙심을 일구며 문화를 가꾸어 왔다.
 비록 시대는 달라도 한반도에도 유사한 제단은 많다. 울산에는 홍산문화 유적에서 나타나는, 한반도에서는 희귀한 원형의 제사유적이 보이는데 그것이 울주군 삼남면 방기리의 알바위 유적이다. 홍산유적처럼 돌로 원형의 석축을 쌓고 그 속에 흙으로 다진 제단 형식의 것이다. 허물어져 원형이 심하게 훼손 되었으나 당시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초석은 그대로이다. 청동기 시대의 유적으로 보이는 방기리 유적은 좀 더 연구해 볼 일이다.

 

   
▲ 동산취 제사유적에서 나온 임신한 여인의 조각상(왼쪽)과 홍산 문화 영향을 받아 형태가 유사한 울산 신암리 '흙으로 빚은 여인'상.

# 여신묘서 발굴된 실제 사람크기 두상
제단과 함께 여신묘(女神廟)는 홍산문화의 상징이요, 특징이다. 여신묘란 여성신(女性神)을 모신 사당(祀堂)을 말한다. 여신묘는 요령성 능원(凌源), 건평(建平) 두현이 서로 마주치는 우하량촌(牛河梁村)에 있다. 이곳에는 수 십기의 대형 적석총과 면적이 4만㎡에 달하는 방형 광장, 돌로 쌓은 담장 유적이 발견 되었다.
 묘(廟)는 1개의 다실(多室)과 1개의 단실(單室)등 두 구조로 건립되었다. 다실은 북쪽에 있는 주된 건축물이고 단실은 부속 건축물이다. 방사성탄소연대 측정 결과 이곳은 지금부터 5500년 전 유적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곳은 홍산 문화를 이룬 신석기인의 종교 성지요, 예술의 보고로 평가되고 있다.
 여신묘에서는 실제 사람 머리 크기와 같은, 진흙으로 빚은 완전한 여신의 두상이 출토되었다. 이 여신의 얼굴은 광대뼈가 튀어 나오고 이마는 둥글며 코는 납작하고 턱은 뾰족하여 전형적인 몽골리안이다. 눈을 강조하기 위해 눈알을 파란 옥으로 장식했다. 여신의 두상과 함께 여섯 개의 크고 작은 나체상 파편들도 발굴 되었는데 소상(塑像)의 파편들을 통해서 보면 주신(主神)과, 주신을 받드는 여러 신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대 사회에서는 여성이 생육과 대지를 상징했다. 지모신에게 제사를 지냄으로써 풍년과 다산을 기원 했을 것이다. 이것은 농경 정착생활로 접어든 신석기인들로서는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신앙의 대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조상숭배 단계 진입 유물
인류사회는 모권사회를 거쳐 부권사회로 진입했으며 부권사회로 진행된 이후에도 모권의 잔영이 있었을 것임은 유추할 수 있다. 우하량 여신묘는 인류사회가 모계사회로부터 출발했다는 것을 실증하고 있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인류가 토템에서 벗어나 조상숭배의 단계로 진입한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유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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