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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정당정치가 '뻘판'으로 가고 있다. 하기야 언제 정치가 대중의 사랑을 받은 날이 있었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오늘의 한국 정치만큼 여야 모두가 공멸의 위기로 가는 경우는 드물었다. 정치이야기를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손사래를 친다. 짜증난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세 명만 모이면 놀이로는 고스톱이고 이야깃감으로는 정치가 단골 메뉴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짜증은 나지만 버릴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문제는 오늘의 우리에게 정치는 단순한 안주감이나 잡담의 대상이 아니라 실생활과 직결된 민감한 문제라는 점이다. 그래서 정치 이야기를 하면 끝이 없는 법이다.
 실제로 정치는 모든 대립을 조정하고 통일적인 질서를 유지시키는 고도의 정신행위다. 조정과 유지를 위해 필요한 것이 대화나 타협일 수도 있지만 모략과 계책일 수도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정치는 스스로의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해 상대방을 복종시키고 통제하려고 하는 속성도 가지고 있다. 지금 한나라당이나 통합민주당에서 벌어지고 있는 '돈봉투' 파문도 사실은 이 같은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다만, 조정과 유지라는 고도의 정치행위를 '돈봉투'라는 말초적인 저급한 술책으로 행사했기에 뒷말이 요란할 뿐이다.

 음지나 안주머니에 감춰진 일들이 햇살을 받으면 눈부터 찡그린다. 광채 때문이 아니라 쏟아지는 시선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음사나 술사는 밤을 도와 이뤄지기 마련이다. 인류의 묵계처럼 전해지는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는 말도 따지고 보면 기득권층 일부의 이해관계가 합치고 흩어지는 과정이 역사라는 말과 다름 아니다. 문제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돈봉투'의 본질이 어디에 있느냐에 있다. 어느날 문득 돈봉투가 터져나온 것이 아니라 안주머니, 혹은 뒷방에 숨겨뒀던 돈봉투가 왜 하필 이 시점에 튀어나와 요란한 변신술을 부리고 있느냐는 점이다.
 한나라당이 박근혜를 선택하자 친박의 정치적 둔갑술이 노골화됐다. 그 첫째는 이른바 '계파척결'을 외치는 주체의 변화였다. 이명박 정부 시절 여당의 미운오리로 남아 있던 친박은 권력을 주무른 친이계의 '계파척결' 외침에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그런 친박이 팔팔하던 어미오리가 뒤뚱거리자 뒤통수를 쳤다. '계파척결'이다. 속편도 요란했다. 친박은 당직을 맡지 않겠다, 기득권을 버리겠다, 급기야 총선 불출마를 들고 나온 인사들까지 있었다. 이쯤되면 친이로 불리던 '훈구세력' '문벌귀족'들은 할 말이 없어진다. 일단 입부터 닫게 만든 셈이다. 그런데 2탄은 의외의 곳에서 터졌다. 친박의 저격수도, 박근혜의 책사도 아닌 초선 의원 고승덕의 입이 열렸다. 친이계 인사로 분류된 고승덕의 돌발변수는 그래서 단연 압권이다. 친이계 대표들이 나눠준 '돈봉투'를 뒷주머니에 챙기지 않고 머리로 접수한 그가 왜 하필 이 시점에 기억을 재생해 세상에 알렸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 타이밍 하나는 절묘했다.

 기존 정치세력을 제거해야 하는 것은 새로운 정치세력의 숙명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김영삼 정부시절,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을 법정에 세운 기록은 이를 잘 말해준다. 한 나라의 탄생 과정에는 수많은 공신이 자리한다. 공신의 이름은 세월이 지나면서 '문벌귀족'이거나 '훈구세력'으로 이름을 달리했지만 개국의 주체나 쿠데타 혹은 밀약의 주모자들이 나눈 피의 승계였다. 고려의 왕건을 도운 세력이 그랬고 조선조 이성계의 추종자들이 그랬다.
 고려의 세번째 왕인 정종은 왕건의 둘째 아들이었지만 왕위를 이었다. 충주 호족 가문을 처가로 둔 정종은 이복형 혜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곧바로 기득권 세력과 선을 그었다. 왕실 외척으로 세도를 부리던 왕규와 공신 박술희 등 정적의 중심을 제거했다. 문제는 수도 개경을 중심으로 한 호족들의 배타적 태도였다. 이때 정종이 들고 나온 카드가 서경천도였다. 개경의 운이 다해 국가의 앞날을 장담할 수 없다는 '개경쇠퇴론'을 흘려 서경 천도로 새 기반을 다지려 한 셈이다.

 물론 정종은 재위 4년 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조선조의 단명 왕인 예종의 경우도 곱씹어볼 만하다. 재위 13개월 만에 의문사한 예종은 한명회로 대표되는 공신 세력을 경계했다. 세조가 어린 임금을 몰아내고 집권한 이후 조선사회는 정란공신들의 세상이었다. 조카를 죽인 원죄에 정권의 정통성 시비까지 휘말린 세조는 피를 나눈 공신들에게 넘치는 재물과 문답을 나눴다. 하물며 사람을 죽인 죄라도 '대를 이어 묻지 말라'는 면죄부까지 쥐어줬으니 공신의 권력이 국왕을 능가할 지경이었다. 무엇보다 공신 세력들은 벼슬을 팔고사는 '분경'으로 권력과 금력을 움켜쥐었다.
 예종의 개혁은 바로 그 분경을 금지하는 일부터 시작됐다. 특히 일반 백성들에게 경작을 허용하는 직전수조법은 공신과 훈구세력, 즉 기득권의 얼굴을 달아오르게 했다. 개혁의 시작은 의욕적이었지만 예종은 열아홉 나이에 의문사했다. 그가 죽자 공신의 수장격인 한명회의 사위가 어느날 갑자기 왕좌를 차지했다. 세력간의 견제와 균형이라는 정치미학이 실종되면 정치는 유혈이 낭자해진다는 역사의 교훈이다. 지금 한국 정치판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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