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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향기 속으로
부산 노포동에서 지하철을 타고 달린 40분은 과거행 급행열차를 탄 기분이었다. 6.25 전쟁이 끝난 후 그 때 그 시절은 어땠을까. 환승을 해야 하는 수고도 없으니 과거로 가는 여행은 더욱 설레였다.


 자갈치역 3번 출구로 빠져나와  부평시장 쪽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책방골목으로 가는 통로다.


 목적지로 가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시장 안은 입맛을 돋우는 맛있는 간식거리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부산의 상징인 '어묵'에서부터 씨앗호떡, 비빔당면, 떡볶이 등 지나가는 행인의 발걸음을 '꽉' 붙잡는 음식들뿐이다. 결국 음식의 유혹에 붙잡혀 '수수부꾸미' 한 입 맛보고 말았다. 여행은 역시 '맛도락 여행'이라 하지 않았는가. 한 손에는 간식 하나 들고 천천히 길을 들여다보는 재미. 그것이 여행의 별미다.


 맛있는 음식 냄새에 취해 쭉 걷다보니 한 골목 너머 책방골목을 상징하는 자그만 탑이 보였다. 보수동 책방골목문화관에서 책 조형물을 쌓아 올려 만든 탑이다. 그러고 보니 이제는 입맛을 자극하는 냄새가 사라지고 추억의 향기가 풍기기 시작했다. '낡고 오래된 것'의 냄새. 분명 현재와 같은 하늘 아래 서 있었지만 책방골목의 긴 거리에는 과거가 있었다.
 
 
#빼곡히 줄지어선 책방과 첫 만남
도착한 곳은 책방골목의 딱 중간 지점이었다. 왼쪽으로 가면 각종 도넛들을 파는 오래된 분식집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59곳의 서점이 쭉 줄지어 있다. 텔레비전 전파를 타면서 더욱 유명해진 보수동 책방골목이라 그런지 이날 이 곳에는 많은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그 중에는 원하는 책을 애타게 찾고 있는 사람들도 종종 보였다. 서점을 따라 걷다보니 바닥에 새겨진 글이 눈에 띈다. '여기가 책방 골목이오'라고 알려주는 듯, 바닥재에는 유명 도서 제목과 작가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읽었던 도서들을 떠올렸다. 과연 책방골목 답게 감성을 충만하게 해 주는 곳이 여기다.


 추운 겨울날, 10평 남짓 안 되는 자그마한 서점들은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더욱 '옹기종기'모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책방골목을 포근하게 만드는 것은 서점 가득 쌓여있는 누런빛 헌 책이다. 발 디딜 틈이 안 보일정도로 책으로 가득한 서점은 고서에서부터 학생들의 학습교재, 소설, 옛날 잡지, 만화책까지 다양하게 꾸려져 있었다.
 
 
#구석구석 숨은 문학작품 구절 찾는 재미
봄물보다 깊으리라/
가을산보다 높으니라/
달보다 빛나리라/
돌보다 굳으리라/
사랑을 묻는 이 있거든/
이대로만 말하리/


   
 
 한 서점 입구 앞에 쓰여 있는 만해 한용운 선생의 '사랑'은 이 곳을 찾은 청춘남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사람들은 책방 앞에 서서 천천히 시를 읊어 나갔다. 어쩌면 책방 구석구석에서 발견할 수 있는 문학작품의 한 구절들이 보수동 책방골목의 매력일 수도 있겠다.


 애정을 불러일으키는 시에 끌려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 서점은 영화에서나 볼 법한 아기자기한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었다. '삐까번쩍' 화려한 것은 아니고 수수한 특별함이 있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서점은 책을 사는 사람들보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붐볐다. 지하 1층은 그야말로 대놓고 '포토존'이었다. 어두울 것만 같은 지하공간은 한마디로 아늑했다. 그러나 '아차'하는 순간은 찾아왔다. 지하 계단을 내려가면서 발견한 작은 쪽지 때문이었다.


 '어이, 거기 사진만 찍는 사람, 여긴 책방이라구. 못들은 척 할래?'
 관광차 보수동 책방골목을 찾은 사람이라면,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할 명언 중의 명언이었다.


 관광지로 명성을 알리고 있지만, 결국 이 곳은 책방골목이었다. 그래서 이 곳을 방문해 꼭 해야 할 일이라면 '사진'을 찍어야 할 것이 아니라, 책장 한 장이라도 넘겨보는 게 필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자는 이 날 꼭 사고 싶은 책이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 공부할 때도 썼지만, 베개로도 쓰였던(?) 참고서다. 현재는 절판 돼 나오지 않아 더욱 희소가치가 높아졌단다. 각 서점마다 들러 그 참고서를 찾아봤지만 쉽게 보이지 않았다. 특히 기자가 찾던 과목 '세계사'는 더욱이 귀하신 몸이었다. 4~5곳을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방문한 서점에서 책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중고라고 하기엔 너무나 깨끗한 책이었다. 애타게 찾아 헤매다 얻은 책이었기에 너무나 기뻤는데, 가격이 반값이란다. 원가 1만7,000원에 팔리는 참고서를 보수동 책방에서는 9,000원에 살 수 있었다. 시중에 나오는 책도 아닌 희소가치 높은 책을 반값에 살 수 있다니 행운 중의 행운이다.
 
 
#헌 책과 함께 새 책 수요 대폭 증가
보수동 책방골목은 1950년 6.25 전쟁 이후 부산이 임시수도가 됐을 때 이북에서 피난 온 한 부부가 목조 건물 처마 밑에서 박스를 깔고 노점을 시작하면서부터 형성됐다.


   
 
 그 당시 부부는 미군부대에서 나온 헌 잡지, 만화, 고물상으로부터 수집한 각종 헌책을 팔았다고 한다. 이 후 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서 책을 팔기 시작했고 자연스레 책방 골목으로 자리잡게 됐다.


 6.25 전쟁 이후 부산소재 학생들은 물론이고 피난 온 학생들은 보수동 뒷산 등의 천막교실에서 수업을 받았다. 그 곳에서 많은 학교가 수업을 했던 관계로 보수동 골목길은 수 많은 학생들의 통학로로 붐비게 됐다. 또 당시 사회가 너무 어려웠기 때문에 서적의 출판문화는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다. 공부하고 싶어도 책을 구입하기가 어려웠던 지식인과 학생들은 노점 헌책방을 자주 찾을 수밖에 없었기에 이 곳은 학생들로 성황을 이뤘다.


 이 곳은 '서점 문화'뿐만 아니라 이별한 이들의 '만남의 장소'이기도 했다. 전쟁 이후 가족과 이별하고 떠나 온 이산가족들과 많은 청춘남녀들은 이 곳에서 추억을 만들었다.


 이렇게 형성된 보수동 책방 골목은 근래 경제적 상황이 좋아지고서는 '새 책'의 수요도 대폭 증가하고 있다. 그만큼 헌 책방과 함께 신간을 파는 책방도 많이 들어섰다.


 최근 인터넷서점과 대형서점이 잇따라 들어서면서 책 읽는 사람들도 증가하고 있다. 책을 좀 더 감칠맛나게 읽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바로 '감성'이다. 그렇기에 생활의 여유를 되찾을 수 있는 보수동 책방골목의 가치는 높을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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