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총선이 두 달 앞으로 다가왔다. 보수와 진보, 좌와 우의 한판 대결로 펼쳐질 이번 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은 전열정비에 한창이다. 18대 국회에서 절대권력을 휘두른 거대여당은 임기말 비리 종합세트로 누더기가 된 채 간판을 바꿨다. 진보의 이름으로 좌충우돌하던 야권도 부분적이긴 하지만 하나로 묶여 통합의 명패를 달았다. 색깔도 바꿨다. 푸름을 거울 삼아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던 여당은 돈봉투에 측근비리까지 얼룩이 물들자 이번엔 아예 붉은색의 미소로 과거를 숨겼다. 야당은 보다 치밀했다. 2030세대의 공고한 지지를 기반으로 힘을 얻은 야권은 아예 최대 포털 사이트의 간판색의 채도까지 맞춰 로고를 정했다.
 일단 간판이 바뀌고 선수들을 모집하는 작업이 분주하니 판은 짜진 셈이다. 4년마다 한번씩 통과의례처럼 이어지는 국회의원 선거지만 이번 선거는 관전자 입장에서 흥미롭다. 간판을 바꾸고 색깔을 바꿔서가 아니라 선거전 자체의 환경이 변해서 그렇다. 장터를 돌고 시장을 누비며 목청을 돋우는 보여주기식 선거판이 아니라 살피고 뒤지고 옮겨보는 주체적인 선거판이 짜여졌다는 의미다. 바로 인터넷과 모바일을 통한 선거문화다. 그래서 총선에 이름을 올린 후보자들은 과거에 비해 훨씬 얼굴이 두꺼워야 한다. 유권자들은 그가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을 했는지 이미 알고 있다는 이야기다.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은 저마다 절체절명의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현역의원들은 자신의 원내 활동과 지역구 기여도를 밑천으로 인물론과 역할론을 튼튼한 뒷배로 삼기 마련이고, 신인들은 기존질서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변화를 무기로 유권자들의 눈빛에 호소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유권자들은 이미 통과의례처럼 길들여진 선거문화에 선입견과 고정관념이 굳건하게 자리해 웬만하면 꿈쩍도 하지 않는다. 한표를 호소하던 눈빛과 돌아서는 눈빛이 묘하게 엇갈리고 달라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정치부 기자로 활동하던 지난 1998년, 과거 김영삼 대통령의 지역구인 부산 서구에서 보궐선거가 있었다. 그 때 아무도 존재감을 모르던 26살의 청년이 살벌한 정치판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상대는 부산시장을 지낸 정문화 후보와 재선의 관록을 가진 곽정출 후보였다. 물론 그들이 26살 정치신인을 경쟁 상대로 생각하지 않았지만 신인의 부지런은 무모할 만큼 성실했다. 하루 3,000장의 명함을 돌리고 집집마다 찾아가 자신의 정치소신을 이야기했다. 그의 신념은 하나였다. 돈을 쓰지 않고도 국회의원 선거를 치를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1,000만원의 기탁금을 돌려받기 위한 최소한의 득표는 받을 수 있다는 신념으로 던진 그의 도전은 무모하게 끝났다. 개표가 있던 날 새벽 그는 용두산 공원에서 목을 맸다. '공직자가 되려는 자는 부정하게 돈을 쓰면 안 된다'는 쓸쓸한 유서를 남긴채 극단적인 선택을 한 그의 빈소에는 당선자의 조화만 을씨년스럽게 자리했다.

 흔히 정치는 살아 있는 생물이라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날지 모른다고 한다. 그래서 경험과 관록을 가진 자들이 국회의 주인이 되어야 국가의 장래가 담보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맞는 말이다. 정치처럼 경험이 무기가 되는 관계학도 드물다. 문제는 생물이 가진 다양성은 조그만 변화에서 시작됐다는 점이다. 경험과 관록의 역학관계를 인정하지만 그 바탕에 스스로를 담금질하고 변화에 능동적인 유전인자를 갖고 있느냐는 사실이다. 혹여 기존의 질서에 매몰돼 있다면, 행여나 자신의 눈빛이 시시 때때로 다르게 느껴진다면 아무리 경험과 관록에 빛나는 인물이라도 이번 선거에는 나서지 말아야 한다.
 선거판은 뻘판이다. 한발 잘못 디디면 흙탕물이 튀고 어어 하는 순간 늪지로 빠져드는 그런 곳이다. 그래서 이론으로 무장한 정치 신인들은 실전에 헉헉대기 마련이다. 신인은 새로움이 무기다. 새롭지 않으면 신인이 아니기에 선거판에 뛰어드는 순간부터 모든 질서를 새롭게 바꿔야 한다. 신인들에게 비판과 변화가 유용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문제는 새로움을 가장한 신인들이 변화를 외치는 점이다. 이성보다는 감성에 호소하고 '바람선거'를 선거판의 롤모델로 삼는 신인이라면 차라리 간절곶 해안에서 동해 맞바람이나 맞을 일이다. 골수부터 새롭게 이식하고 그 새로움이 우리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가를 고민했다면 문제는 다르다. 하지만 활자로 적어보는 새로움, 자신도 겸연쩍은 정치신인이라면 이번 선거에는 나서지 말아야 한다.

 선거를 앞두고 정치부 기자들이 바빠졌다. 프레스센터에는 출마를 외치는 이들이 줄을 섰다. 절묘하게 출마시기에 맞춰 모습을 드러내는 인물들, 황당하기까지 한 장밋빛 미래를 이야기하는 인물들, 한술 더해 만나는 사람마다 '소원을 말해봐'라고 노래하는 후보들도 무수하다. 미안하지만 그런 인물들에 대해 유권자들은 이미 그들이 지난여름 무엇을 했는지 잘 알고 있다.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고 내가 무엇을 했는지, 그리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확실한 대답을 들을 수 없다면 제발, 이번 선거에는 나오지 말아야 한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