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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문화가 한국문화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새로운 시각과 사료를 바탕으로 재조명한  『이슬람과 한국문화』(이희수 지음)책이 발간되었다. 이 교수는 30년 이상 이슬람에 대해 연구를 하였다. 특히 이 책에는 울산 시민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으며 '처용'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또한 울산에서는 매년 10월 에는 '처용문화축제'가 열리곤 한다. 우리는 보통 '처용'의 존재에 대해서도 5가지 설이 있어서 허구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교수는 "페르시아 왕자의 신라 진출을 전해 주는 고대 페르시아 구전 서사시 『쿠쉬나메』의 발굴과 연구는 신라 사회의 대외 접촉사에 새로운 실마리를 던져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슬람문화가 신라로 갈 수 있는 교두보 역할을 해준 것이 바로 울산의 개운포 항인만큼 역사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곳이 기도 하다. 이슬람 문화의 한반도 유입을 이슬람 자료를 근거로 제시하는 이 교수를 만나 이슬람과 울산, 신라문화와 이슬람의 관계에 대해 들어본다.

4세기부터 개운포 통해 신라로 이슬람 문화 유입 추정
통일전 7세기초 페르시아 왕족·유민들 대규모로 거주
최근 페르시아 대서사시 '쿠시나메'필사본서 증명 돼
처용을 설화로 치부하기보단 역사에 입각 규명해봐야
 
▲이슬람문화가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들어온 시기를 언제라고 보나.
-이슬람과 서역·아랍 개념이 각각 다르게 봐야한다. 이슬람은 610년 그 이후를 이슬람 문화라고 그 이전에 왔던 것은 아랍 페르시아 일수도 있다. 아랍이나 페르시아 문화를 현재까지 기록이나 고고학적 유물로 봐서 한 4세기부터 이미 우리 한반도 쪽으로 진출 했다고 볼 수 있으며, 특히 신라 쪽에 진출했다고 볼 수 있고, 그것은 신라 고분에서 발견된 유리제품들이 한 4~5세기 판단되기 때문에 그 이전부터 교역이 있어왔다고 진단 할 수 있다. 다만 역사라는 것이 '기록 없이 역사 없다' 기존관념 때문에 기록이 문제가 크게 걸려있었고, 최근에 고대 페르시아 구전서사시 '쿠시나메'가 발견되고, 서사시 800페이지 중에 500 페이지 가량이 신라에 대한 기록으로 새롭게 밝혀졌고, 제 책에서도 소개를 했지만, 이 기록이 연대가 통일신라 직전 7세기 초, 중엽에 해당되기 때문에 페르시아 왕자와 유민일행들이 대규모로 신라에 와서 거주하고 신라공주와 결혼하고, 그 사람들이 신라에 거주하면서 보았던 신라 집이나 기후나 산물이나 국제 관계 등을 기록한 서사시가 필사본으로 나왔기 때문에 7세기 초 상당히 신라에 건너왔다고 볼 수 있다.
 
▲ 이슬람 문화와 한국문화의 공통점이 있다면.
-자세히 보면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나 다 아시아에서 발생한 종교이다. 오리엔트아시아의 끝이 하지만 그러나 유대교나 기독교는 유럽에 가서 번성했기 때문에 유럽의 종교로 변형이 되었지만 유일하게 아시에서 발생해서 아시아 쪽에 뿌리를 내린 것이 이슬람교다. 따라서 물론 지리적으로 한국과 서아시아가 10,000키로 이상 떨어져 있지만 거기서 발생한 것이 실크로드를 따라서 아시아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중국에 까지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지구상에서 어떤 다른 종교보다도 아시아의 가치를 공유 할 수밖에 없다. 이슬람문화를 서구적 시선이 아닌 우리 시선으로 있는 그대로 본다면 사실 우리문화를 닮은 점이 너무 많다. 가족중심의 삶이라 던지, 상부상조(공동체정신), 또 스승 선배나 윗사람의 절대적인 공경의 문제 남녀의 성적문란을 방지하기위해서 남녀칠세부동석 7세 되면 남과 여를 분리하고, 상당히 윤리와 도덕을 강조하던 조상을 지극히 섬기고 역사와 전통을 중시하고 물질적 승작보다 정신적 가치를 자기가 가져왔던 역사와 전통의 자긍심 이런 것들은 서양문화와 비교해보면 거의 우리문화와 가깝다고 볼 수 있다.
 

   
▲ 이희수 교수는자신의 책 '이슬람과 한국문화'에서 개운포가 신라의 국제무역항으로 역할을 수행했으며 처용은 중국 황소의 난을 피해 도망온 페르시아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진은 외쪽부터 악학궤범의 처용탈과 복원된 모습. 그리고 아랍인 형상을 하고 있는 경주 괘릉의 석상들.


▲그동안 연구하시면서 울산이 국제항으로 역할을 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지.
-구체적으로 울산 나오는 자료는 아직 없는 것 같다. 처용이후부터 개운포가 활성화 되었고 처용이 등장한 것이 880년경이니깐 그 당이 개운포 건성은 아랍·페르시아 상인들이 신라로 본격적으로 진출한 시기와 맞아 떨어진다. 현재로서는 국제시장으로서 경주로 나아가는 입항은 울산으로 보는 게 일반적인 것이고, 많은 아랍학자들도 이 부분에서 울산을 통해서 갔을 꺼라 본다. 거리상이나 지리적 입지나 현재도 만찬가지고, 울산이 대 시장 경주로 가는 중요한 해상항구의 입항이고 국제 교역항 역할을 했다는 것은 저로서도 절대적으로 믿고 있다.
 
▲울산시민들은 처용에 대한 관심이 많은데요. 처용의 설에 대한 부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지금까지 우리가 우리역사를 바라볼 때 제일 좁은 한국 땅에서 한국 사료에만 입각해서 우리중심으로 보니깐 제대로 해석이 안 되었던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처용이 삼국역사에 등장하는 헌강왕 879년이라 것이 바로 이웃인 중국산둥에서 게르만 민족대이동 다음에 정말 세계사를 뒤 흔드는 민족이동이 일어나는 황소의 난이 대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다. 황소의 난 대격변이 일어나고 목숨부지 하기위해서 동남아로 중국내륙으로 도망가고, 신라로 도망가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황소의 난이 한창 막바지에 도달 했을 때, 그시기에 처용이라는 하나의 새로운 집단이 개운포 앞바다에 등장하는 걸 이걸 우릴 신비나 미스테리나 설화나 근거 없는 걸로만 돌려버리기는 너무 아깝지 않은가 이렇게 보면 그 당시에 세계사적 방정식에 이걸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우리가 정교하게 다듬어야 처용에 대한 실체를 재  조명 될 수 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 조상들은 이슬람문화를 어떻게 받아 들였나.
-우리문화기층에도 알게 모르게 이슬람 문화가 많이 영향을 끼쳤다. 서양의 어떤 문화 보다 이른 시기부터 접촉해왔고 그 사람들이 직접 들어와서 살면서 그 당시 우리보다 앞서있던 과학과 문명과 학문적 지식들을 전파해주었다. 그런 면에서 조선 초기 때 세종이 우리역사상 최고의 학문적 르네상스를 만들어 낼 때 그 르네상스 지적바탕이 제공했던 것이 이슬람과 과학과 학문이다. 하루아침에 도입된 것이 아니라 신라부터 고려 말, 조선 초기를 거치면서 두텁게 축적된 이슬람 두뇌집단들에 의한 한국문화의 기여 이런 것들을 우리가 배재하고 설명하지 못 할 정도로 최근에는 과학사 쪽에서도 조선 초기의 것과 이슬람과학의 직접적 연관이 있다고 보고 있다. 신라부터 고려, 조선 초기 까지는 개방적 이였기에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본다.
 
▲이슬람 문화를 쉽게 이해하고 배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우리가 중동을 이슬람하고 이해하는 키워드가 70-80년대 이후 중동시장에 진출하면서 건설, 석유, 테러라는 세 가지 창을 통해서 중동을 이해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15억 57개국이나 되는 지군촌의 4/1이 되는 최대 단일 문화권이고, 이세계가 자원과 자본을 가지고 있고, 우리와 불가분의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있다면 이제 한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뉴스 중심적이고, 표피적인 창을 통해서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인문학적 깊이나 역사적 정통이나 내부문화를 먼저 이해가 필요하다. 최근에 와서 몇몇 이슬람에 관한 책들이 나오고 있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하기에 유학을 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하겠다. 젊은이들이 가서 정말 혼신의 힘을 던져서 제대로 공부한다면 남들이 보지 않는 미지의 상태로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관심을 돌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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