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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해가 넘어가다 말고
창호지에 어른거릴 때면
방문 앞에 앉아서 연필 칼끝으로
발뒤꿈치의 굳은살을 깎아내던
아버지처럼, 그것이 노동의 달콤함이고
그만의 소박한 휴식이었던 그 사람처럼
살아 계실 때 시골에서 쌀과 깻잎을 등에 지고
말씀 한 번 없이 내 반지하 방에 찾아오던 아버지
비좁은 방바닥에 엎드려 시를 쓰는 아들을 위해
벽을 사이에 둔 것처럼 돌아 앉아
버릇처럼 발바닥의 굳은 살을 떼어내던 사람
시가 써지지 않아 고개 들면
어느 새 반지하의 창에 어른거리던 저녁빛이
작고 구부정한 등에 실루엣으로 남아 있고
글씨 그만 쓰고 밥 먹거라
방해될까봐 돌아 앉지 못하고
내 등을 향한 듯한 그 사무치던 음성

■ 시작노트
가난한 시인 아들은 밥이 되지 않는 시 몇 줄로 하루를 밝히고 못 배운 아버지는 그런 자식에게 방해될까 비좁은 방안 자식과 등을 돌리고 앉았다.
학교 졸업장을 받지 못한 우리 부모들은 자식들이 책을 읽고 글을 쓰면 그것이 뭔가 엄숙한 일이라도 되는 양 숨을 죽이고 바라보곤 했다. 자식의 연필 끝에서 긴 문장이 나올 때면 마치 당신이 이루지 못한 꿈이 펼쳐지기라도 한 듯.
첫 시집이 나오던 날 아버지를 묻었다는 박형준에게 이 시가 더욱이 가슴을 울리는 것은 이런 아버지들을 우리는 누구나 마음에 안고 살고 있기 때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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