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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에게 책은 신문
몇주 전 '우체부 시인'으로 유명했던 박영식 시인이 퇴직하며 마련한 서재이자 문학공간인 '푸른문학공간'을 찾았다.
 울산시 남구 신정2동 1611-19번지 2층에 마련된 이곳은 시인이 우체부 시인이란 별칭을 떼고 시인으로 인생 제2막을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그의 서재에 가면 3,000권에 달하는 책보다 더 눈길을 끄는 공간이 있다. 집필 공간 홀 뒤에 마련된 내실에 있는 신문 스크랩 자료들이 그것으로 지난 40년동안 그가 직접 스크랩해온 신문기사들이다. 최근에는 종이신문과 더불어 인터넷 기사를 출력해 책으로 만든 자료집까지 그 양이 수백여 권에 달한다. 그는 어쩌다가 이렇게 스크랩의 달인이 될 수밖에 없었을까.
 그는 형편이 어려웠던 어린 시절 책을  구하지 못해 폐종이 사이에 끼여있던 신문이나 책 등에서 좋은 글을 발견했던 시절이 있었다고 했다. 그가 처음 스크랩한 자료라며 꺼낸 책을 보니 1972년 4월 8일이란 신문의 날짜가 선명했다. 열아홉 소년은 어떤 마음으로 이런 글을 모으기 시작했을까.
 

▲ 박영식 시인이 평생 꿈꿔왔다는 그의 서재이자 동료 문인들과의 소통의 공간인 '푸른문학공간'. 장서 3,000여권이 비치돼있을 뿐 아니라 그가 40여년을 모은 스크랩자료 수백여권이 자리잡고 있다.


 경남 삼천포가 고향인 시인은 부산 해광고를 다닐 때부터 문학 청년으로서의 뜻은 두었지만 그것을 제대로 펼 기회를 좀처럼 잡지 못했다.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일곱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포구에서 생선장수 등으로 근근이 끼니를 잇는 어머니 밑에서 자라는 동안 대학에서 문학의 꿈을 키워보리라던 희망은 곧 힘들이지 않고 꺾어 버렸다.
 "성취도 어렵고 돈도 안되는 일에 질질 끌려다니지 말고 니 입에 풀칠이나 하그라"는 어머니의 말을 따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형들의 권고에 따라 구두닦이도 해 보았고 군대에 다녀와서는 울산에 있는 형 집에 머물면서 현대자동차 공장에서 기능공 생활을 몇년간 하기도 했다.

 이런 얘기를 듣다보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대학인플레에 정보의 홍수라고 할만큼 지금은 교육과 지식이 지천에 널려있지만 그만큼 절절하게 책이나 지식에 목을 메며 공부하는 이들은 그만큼 찾기 힘들어진 요즘 우리의 모습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가 손수 한 장 한 장 모은 이 스크랩자료는 어떤 유명 출판사의 값비싼 전집과도 견줄수 없는 가치를 지녔을 지도 모른다. 교육과 지식의 전달이 어느덧 숟가락 떠먹여 주는 모양새가 된 지금의 시대에서 말이다.

 특히 문학의 길을 걸어온 그이기에 스크랩자료는 각종 신문에 실리는 시의성이 있는 문학작품들이 대부분이다. 매해 신춘문예가 발표되면 그는 각종 신문들의 작품을 모으기 위해 두 아들을 동원해서까지 신문을 모아 스크랩을 하고 살아있는 그 작품들을 갖고 때로는 읽고 습작하며 공부를 했다.

불우한 어린시절 문학 열정 접었지만
40년간 신문 스크랩 틈틈히 습작활동
우체부하면서 당당히 신춘문예 등단
울산에 문학박물관 생기면 자료 기부


 대학을 다니지 못한 그에게 학벌이 일종의 권력이 된 한국 사회의 사회적 편견은 그의 어깨에 콤플렉스를 얹기 충분했다. 그런 편견에 오래도록 시달리다보니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고 작품활동을 했음에도 늦은 나이에 다시 대학에 갈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늦깎이로 동아대 방송통신대에서 문학이론 수업을 들었다. 하지만 그는 그 때 깨달았다. 문학은 책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그동안 살아오며 살아온 체험들 그 자체가 문학을 위한 재료이자 풀어낼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 그는 학력 콤플렉스 쯤은 극복했다고 했다. 극복 정도가 아니라 자긍심을 느낄 정도로 그의 다사다난했던 지난 삶의 궤적들은 소중한 경험이자 삶, 그리고 그의 작품의 자양분이 되었다.
 실제 지금은 대학을 나오지 않은 자신에게 박사 학위를 딴 이들도 문학을 배우기 위해 그를 찾게 됐고 그의 제자중 시조시인을 비롯한 문인으로 등단 것만도 30여명에 달할 정도가 됐다.

 

 

 

 

 
# 삶이 영글면 시는 저절로 태어난다
그의 시에는 우리의 삶이 그대로 녹아있다. 삶이 영글면 시는 저절로 한 줄의 언어로 응축되어 나온다는 것을 나는 그를 통해 믿게 됐다. 그간 파라만장했던 그의 삶이 그에게는 작가로서의 다양한 자양분을 제공한 것이다.
 그가 어렸을 때 자신과는 터울이 졌던 누나가 '쫓기듯' 시집을 갔다. 몇 십년전 일이니 그 때의 시집살이의 고달픔은 익히 알만했다. 아이를 낳고 허리가 휘도록 일을 하다 본인도 어느덧 허리가 휜 할머니가 됐다.

 그의 시 '누야'는 그렇게 태어났다. 그가 본 누나의 삶이 그의 시를 통해 오롯이 살아난 것이다.
 
 하모 하모
 아가아
 밥 무웃나
 
 사천 용현 갯가
 따개비처럼
 딱 붙어사는 누야
 
 쫓기 듯 시집가서
 아 하나 낳고
 말없이 일하고
 아 둘 낳고
 허리 휘도록 일하고
 아 셋 넷 놓고
 ㄱ자 되도록 일하고
 
 마당가
 툭 툭
 감꽃 떨어져도
 이제 아무 말 없는
 할무이 됐다. (박영식昨 '누야')
 
 그래서 그의 시는 가슴을 울린다. 삶에서 녹아나온 것이기 때문에 거짓이 없고 꾸밈이 없다. 문학이란 이렇게 치열하게 살아온 삶을 통해 영그는 것이란 걸 그는 삶을 통해 또 그의 작품을 통해 보여준다. 앞으로 울산에 문학박물관 등이 생기면 그간 40년간 모았던 자신의 자료들을 기부하고 싶다는 박 시인. 그의 따뜻한 꿈이 이뤄지도록 울산에도 그런 공간이 생겨서 그의 삶의 궤적들이 지역의 후손들에게도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와 그의 작품들이 형편이 유복하지 못해 많이 공부하지 못한 이들도 문학의 꿈을 예술의 꿈을 이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희망이 되길 바래본다.

[박영식 시인이 꼽은 내 인생의 책]

 

 

"난중일기 접하면서 문학에 세상 움직이는 힘 있음 느껴"

간혹 '내 인생의 책'이 무어냐고 물어오면 할 말이 없다. 초등학교 땐 맨 앞자리에만 골라 앉을 수밖에 없었던 내성적이고 젤 키 작은 꼬마. 여섯 번의 전학 끝에 초등학교 졸업장을 받은 게 전부다.
 그 뒤 야학으로 고등공민학교(새마을학교)를 짜깁기로 다녔고, 시인이 되면서 문학적 이론에 열등의식을 느낀 나머지 한국방송통신대학 국어국문학과에 5년을 수학했다. 그곳에서 학문과 문학은 연관성은 있어도 별개임을 절감했다.

 소년기에 어쩌다 손에 잡히게 되어 읽게 된 책이 춘원 이광수의 장편 『무정』이었고, 그뒤 1968년 판『난중일기』를 접하면서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무엇보다 문학임을 알았다.
 시집은 부산 보수동 헌책방골목을 오가며 구입하게 된 하이네, 바이런, 괴테, 워즈워드 등등 주로 외국 시인들의 것이었고, 국내 시인으로는 만해 심훈 소월 세 사람의 합본인『못잊어』를 읽게 된 것이 시인적 발아였다.

 그 외로는 읽을거리가 귀했던 시대고 보니 문학과 관련된 모든 것들은 신문 잡지를 가리지 않고 스크랩하여 책으로 엮고 텍스트로 삼았다.
 그런 습관이 몸에 배여서 인지 읽을거리가 범람하는 지금에도 가위, 칼, 자를 하루에 몇 번이고 들었다 놓았다 한다. 서울의 어느 명사는 날 보고 스크랩의 달인이라고까지 운을 띄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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