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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흐려져서 세상이 더 흐린 날
가만히 눈을 감고 난간에 기대서면
연잎을 꺾어 쓰고서 뛰어오는 아이들

이빨만 하얗게 여름 끝을 다 태워도
연밥처럼 딴딴하게 희망이 여물었지
한없이 찌를 바라보며 기다림도 배웠지

시장바닥 한평생에 욕 한 줌 묻히지 않으신
아, 저기 내 어머니 꽃잎을 열고 걸어 오시네
스스로 맑지 않고선 알 수 없는 향기로---

■ 감상노트
'연호정, 그 기억 속으로' 시조를 읽어 내리면 무척 마음이 따뜻해져 온다. 천진난만한 동심과 삶에 대한 희망을 놓치지 않으려는 기다림. 그리고 무엇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며 아름다운 이름인 어머니! 이러한 시의 얼개는 세월의 때가 묻은 자신을 성찰하며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명징한 거울이 아니겠는가. 유년의 정거장에서 출발하여 훌쩍 불혹을 넘긴 삶은 이제 너무 멀리 달려와 간이역에 닿아 있다. 내가 흐려져서 세상이 더 흐린 날, 기대선 창가에 문득 실루엣으로 일렁이는 형상은 빈 가슴 밑바닥에 지워도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빛바랜 고향의 얼룩일 것이다.

   
 

■ 시조를 소개해준 박영식 시인은
경남 사천 출생. 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부문 당선(白磁를 곁에 두고). 85년 季刊 시조문학 봄호 추천완료(조가비). 제13회 성파시조문학상 수상(靑沙浦). 저서 : <자전거를 타고서>(2005년) 외 다수. 현재 <푸른문학공간>을 운영하고 있으며 울산시조시인협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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