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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죽었다. 왕이 죽자 왕비가 따라 죽었다. 왕이 죽고 왕비가 따라 죽는 일련의 과정은 이야기다. 왕이 죽었다는 사실관계는 건조한 보도에 불과하지만 '따라' 죽은 왕비에게 사람들은 귀를 쫑긋 세우기 마련이다. 왕비의 죽음 뒤에 은밀하게 감춰진 것은 가족사일수도 있고 권력의 암투과정이 곰팡이처럼 숨어 있을 수도 있다. 그 궁금증은 곧바로 죽은 왕의 뒤를 이을 후계와 왕비의 죽음으로 남겨진 왕실의 자손들로 이어진다. 이 간단한 기본구조를 통해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영화화 됐고, 드라마나 소설로 재구성됐다.


   문제는 재구성의 기록들이 사실과 상당한 이격거리가 있지만 말초신경을 곧추세운 대중들은 사실보다 융기처럼 돋아난 흥미에 열광한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인 왜곡이 몇 해 전 방영된 드라마 '선덕여왕'이다. 한민족 역사상 최초의 여왕인 선덕의 일대기를 그린 이 드라마는 사료의 절대부족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었다. 그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은 덕만의 생애를 드라마는 아주 오래, 그것도 흥미진진한 영웅탄생구조로 각색해야 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왕실의 암투와 타클라마칸 사막이다. 권력의 중심에서 벌어지는 암투는 선과 악의 대결을 넘어 욕망과 욕정이 이글거린다. 핏줄을 살리려는 부정이 시녀를 통해 공주를 탈출시키는 아버지로 설정되고, 그 공주는 척박함의 절대지대인 사막으로 무대를 옮긴다.
 

 자고로 영웅은 그렇다. 영웅담의 기본 틀은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효녀설화의 원조 격인 바리데기 공주도 그렇다. 어비 대왕과 길대 부인의 일곱째 딸인 바리데기가 부모의 버림을 받고도 바리공덕할멈 내외의 수양딸로 자라, 무시무시한 무장승의 아내로 온갖 고초를 겪다, 죽음에 이른 부모를 구하는 이야기는 영웅담의 기본이다.
 

   덕만 역시 그렇다. 사실관계가 없으니 과정은 만들어내면 된다. 증명할 길이 없으니 어깃장은 있어도 책임은 없다. 궁에서 쫓겨났다가 다시 궁으로 돌아오는 과정 속에 사막은 절묘하다. 왕실과 서라벌의 온실 속에서 사는 경쟁자들과 차별화하는데 사막 이상의 설정은 없다. 그래서 어린 덕만은 죽음의 위협을 뚫고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성장한다. 성장통의 또 다른 설정은 덕만을 왕으로 인정하는 시청자들의 긍정을 얻기 위한 작가의 암수다. 하지만 단순한 설정을 넘어 한 국가의 대권을 잡는 설정은 영웅담 이상의 무엇이 필요한 법이다.
 

 수첩공주, 얼음공주라는 닉네임을 가진 박근혜 후보는 살아있는 현대사라는 점에서 다른 대권 후보들과 차별성을 가진다. 화려한 청소년기와 독보적인 청년기를 거쳐 비극적인 가족사를 가슴에 묻은 그는 특별하다. 환하게 웃는 얼굴은 한없이 밝아 보이지만 침묵하는 표정엔 냉기가 흐른다. 그 냉기를 내공으로 뱉는 엄선된 언어는 무게가 있다. 그래서 한마디 한마디가 뉴스의 초점이 된다. 5·16이 그렇다. '구국의 혁명'에서 '최선의 결단'으로 이어지는 그의 역사관이 도마에 오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공주는 고독하다. 가족사가 곧 현대사로 연결되는 그에게 정적들은 가족사의 객관화를 요구한다. 객관화를 넘어 평가서를 내라는 대목에서 그의 얼굴은 굳어질 수밖에 없다. 그에게 박정희는 군사 쿠데타를 주도하고 장기집권을 도모한 군부 출신 정치가가 아니라 여전히 어깨 두드리고 그윽한 눈빛 보내는 아버지로 기억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문제는 그가 유력한 차기 대권 후보라는 사실이다. 아버지의 죽음이 유신시대의 종말을 알렸고, 구국의 혁명이 또 다른 군부의 쿠데타로 이어진 역사는 가족사가 아니다. 아버지 시대를 역사의 평가에 맡기자는 이야기를 한다면 스스로 평가에 출발지점을 정해두는 일은 삼가는 게 맞다. 말이 말을 낳아 말로 어지러운 세상이다.
 

   공주가 금을 그으니 공주의 남자들이 말을 보탠다. 박근혜 캠프의 숨은 입, 이상돈과 박효종이다. 그들은 공주의 '보이스가드'들이다. 박효종이 힘을 보탰다. 그는 5·16에 대한 논란이 있기 때문에 역사에 맡기겠다는 표현이야말로 역사 앞에 겸손하고 정직한 표현이라고 박근혜 후보를 옹호했다. 박근혜 후보에게 5·16은 쿠데타가 아니다. 이 사건은 혁명이며 유신체제는 옹호의 대상이다. 다음세대가 공부하는 교과서에 5·16은 '군사정변'으로 기록돼 있다. 헌정질서를 유린하고 민주주의를 파괴한 일은 구국의 혁명과는 완전히 다른 역사인식이다.
 

 문제는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승자의 논리가 일반화되어서는 곤란하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가 역사에 대한 인식에 매달리는 것은 역사적 평가가 우리의 기본적인 삶의 질서에서도 똑같은 논리로 자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래를 말하려면 과거를 극복해야 한다. 그 과거를 역사에 맡기겠다는 것이 박근혜 후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면 주관적 잣대로 금을 그어서는 안 된다. 정제되지 않은 말은 스캔들로 이어진다. 정치에서는 더욱 그렇다. 말보다는 행동이 정치의 스토리가 되어야 한다. 심리적 고난의 과정이 아닌 현장에서 부딪히는 고난의 과정이 언제나 약점으로 작용한다면 지금부터라도 그는 현장에 있어야 한다. 현장에서 마음으로 백성과 소통할 때 바리데기든 덕만이든 백성과 하나가 됐다. 정적에게 뱉는 말은 스캔들이 될 수 있지만 국민과 함께 현장에서 주고받는 공감은 아름다운 로맨스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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