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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은 근대 50년의 역사로 세상에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울주'라는 이름이 부여된 지 1,000년을 눈앞에 두고 있는 지역이다. 울주 정명 1,000년을 눈앞에 둔 사실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한반도 문화의 서막을 알리는 반구대암각화부터 신라 문화와 또 다른 차별성을 가진 울산문화권의 오래된 역사는 물론, 정명 1,000년의 기록까지 가히 역사 문화의 도시로서 그 위상이 바뀌는 추세다. 바로 이 같은 시점에 울주군과 울주문화원이 의미 있는 작업을 시작했다. '울주 1,000년, 인물을 만나다' 라는 프로젝트로 울주의 역사 문화에 족적을 남긴 인물을 재조명하는 작업이 그것이다.
울산에 박물관이 문을 열었을 때 대한민국의 많은 이들이 굴뚝 도시 울산에 박물관이 들어섰으니 굴뚝의 역사가 즐비하리라는 상상했다. 그런 이들에게는 울산은 여전히 굴뚝이 즐비하고 돈이 넘치는 '부자도시'라는 이미지로 울산은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울산박물관에서 울산의 역사를 둘러본 뒤에는 사정이 달라진다. 울산은 한반도 인류의 시원이 깃든 땅이다. 한반도의 동남 쪽에 위치한 울산은 예로부터 사람이 살기 좋은 터전이 되어 우리의 선인들이 아득한 원시시대부터 육로나 해로를 따라 들어와 정착사회를 이뤄 살았던 곳이다. 거짓말처럼 들리는 이 이야기는 울산박물관에 가면 확인할 수 있다.
울주군 서생면 신암리 유적이나, 장현동 황방산의 신석기 유적이 있고 석검이 출토된 화봉동과 지석묘가 있는 언양면 서부리의 청동기 유적이 있다. 어디 그뿐인가. 한반도 선사문화 일번지인 대곡천 일대의 암각화는 울산이 고대 한반도 정착민의 영험한 영역이었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울산은 천혜의 땅이다. 그 천혜의 땅에서 일궈낸 문화의 힘이 고대국가와 신라, 고려와 조선을 지나 오늘에 연결돼 있다. 그 땅에서 수많은 인물이 나왔다. 신라의 충신 박제상부터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 선생까지 천혜의 땅 울산은 물산만이 아니라 인물로도 대한민국 어느 지역에 비할 바가 없을 만큼 출중한 족적을 남겼다.

울주군 언양읍 송대리에 위치한 위열공 김취려 장군의 묘.

1. 중세사에서 장군의 위상
강감찬 장군에 버금가는 언양 출신 고려 무인
13세기 몽골-거란의 잦은 전쟁속 거란군 격퇴
제천 박달재 전투로 몽골과 평화체제 이끌어내
언양 화장산·강화에 묘소…박달재엔 공원도

창간 6주년 특집으로 본지는 바로 울산이 낳은 인물을 재조명하고 역사 속에서 그들의 역할과 울산의 위상을 되짚어 오늘의 의미를 살펴보기로 한다. 그 첫 번째 인물이 중세 한반도의 최대 위기 상황에서 거란을 물리치고 한민족의 기개를 만방에 알린 위열공 김취려 장군이다.
 언양 화장산에는 울산이 낳은 문무의 양대 산맥이 산자락 양쪽에 모셔져 있다. 바로 위열공 김취려(金就礪) 장군 묘와 소설가 오영수 선생의 묘다. 600년의 시차를 둔 두 인물의 묘가 화장산에 자리한 것은 우연의 일치일지 몰라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영수 선생은 울산의 산업화와 더불어 빈곤한 문화예술의 자산을 부각하는 작업으로 가꾸고 보존하며 기념하는 일이 이어졌지만 600여년 전, 난세의 고려를 구한 김취려 장군은 여전히 과거 어느 한 시절, 오랑캐를 물리친 장군 중의 하나로 여기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김취려 장군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동북아의 역사를 공부하는 이들은 일찍이 김취려라는 인물에 매료돼 그의 삶은 물론 중세 고려사 속에서 그가 차지한 군사 외교적 비중을 재조명하고 있다.

#'변방의 지휘관' 고려 조정 튼튼한 울타리
김취려는 신라 경순왕의 7자 언양군 김선(金繕)의 후손이며 예부시랑(禮剖侍郞) 부(富)의 아들로 본관은 언양(彦陽)이다. 고려의 음서제도인 음관(陰官)으로서 출사한 이후 무관으로 활약한 장군은 당시 고려 조정의 실세인 최충헌의 총애와 견제를 동시에 받은 고려 조정의 중심이었다. 김취려 장군이 고려사의 사료나 정사에 충분한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것은 바로 무인집권시대의 특수성과 최충헌이라는 당대 최고의 권력과 김취려 장군과의 특수한 관계 때문이다.

 최고의 권력은 언제나 하나로 충분하다. 권력의 정점에 또 다른 권력이 등장하면 피비린내가 진동하기 마련이다. 최충헌의 야심을 잘 알고 있던 김취려는 그래서 조정의 중심에서 스스로 멀어졌다. 전쟁의 현장, 변방의 지휘관으로 고려 조정의 튼튼한 울타리가 됐던 김취려의 젊은 시절은 바로 권력의 정점으로 향하던 자신의 위상을 스스로 변방으로 돌린 김취려만의 특별한 선택이었다.
 이와 관련한 심층적인 연구가 나왔다. 김취려 장군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는 공주대 윤용혁 교수가 지난해 한 심포지엄에서 김취려 장군의 외교적 역할을 재조명한 것이 그것이다. 윤 교수는 김취려 장군이 13세기, 당시 몽골이라는 새로운 세력에 대해 군사력보다는 외교적 방식에 의한 평화체제를 구축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내놓았다. 윤 교수는 "김취려 장군은 출중했던 군사적 전공으로도 높이 평가받아야 하지만 몽고의 출현으로 대외정세가 극히 불안했던 13세기 초에 외교적 방식으로 몽고와 평화체제를 이뤄냈다는 점에서 새롭게 평가받아야 한다"면서 "14세기 들어 이제현이 '김공행군기'를 통해 김취려 장군을 재조명하게 된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였다"고 밝혔다.

#13세기 초 대외정세 불안 속 '외교적 방식' 선택
13세기 초는 금(여진)과 거란, 몽고가 북방의 패권을 두고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생존 게임을 벌이고, 고려와는 줄곧 우호관계를 유지해왔던 한족의 나라 송(宋)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던 시기였다. 12세기 금이 흥기했을 때는 전쟁도 치르지 않고 금에 사대의 예를 표했을 만큼 유연했던 고려지만 13세기엔 몽고의 침입을 받고 만신창이가 된다. 그 전란의 와중에 고려가 몽고와 외교적인 화의를 이뤄내고 몽고 역시 고려를 외교적 파트너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데는 김취려 장군의 전공이 든든한 뒷배가 됐다는 것이 전문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칭기즈칸이 몽고족을 통일하고 중국 대륙으로 세력을 급격히 확장하면서 고려는 몽고에 의해 밀려 내려온 거란과의 생사를 건 결전을 벌일 수밖에 없게 됐다. 13세기 초, 이런 북방 대륙의 소용돌이 속에서 울산 출신 김취려 장군은 거란을 막아내고 몽고와의 '형제맹약'을 맺음으로써 고려의 존립을 지켜냈다.
 그 성과의 중심에 있는 것이 박달재 전투다. 거란이 압록강을 건너 고려의 북방으로 침입해오자 후군병마사로 참전해 제천 박달재에서 10만명에 이르는 거란군을 물리쳤다. 다음해인 1218년에 이어 1219년에도 거란은 고려를 침입해왔는데, 이때는 몽고군이 거란군을 쫓아 내려와 강동성에서 김취려 장군과 함께 거란군을 협공, 승리를 거뒀다. 이때 김취려 장군은 몽고와 '형제의 맹약'을 맺어 몽고와의 평화체제를 구축했다. 바로 그 강동성 전투가 몽고와의 외교에서 대대로 중요한 근거로 작용했다. 고려를 한달음에 짓밟을 수 있는 나약한 나라로 생각했던 몽고가 경계와 위험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힘이 아닌 외교로 관계를 재정립하는 데 김취려의 전공은 큰 버팀목이었다. 바로 그 기개와 업적은 고려사는 물론 중세 한반도사에서 다시금 조명되어야 할 김취려 장군의 위상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김진영 편집국장ced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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