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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군사력은 국가를 지탱하는 중요한 기반이다. 특히 중세시대 동북아 정세하에서는 군사력이야 말로 국가의 존립을 좌우하는 절대적인 문제였다. 지금의 사정으로 보면 한 국가의 군사력은 정보전에 의해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나기 마련이지만 중세시대는 달랐다. 북방의 패자인 몽고가 기마부대를 앞세워 중원을 공략하고 금을 치고 고려를 먹으려 할 때 고려로서는 대항할 방법이 없었다.


전통 무반가문서 태어나 15세때 부음으로 관리로 나서
첫 보직부터 대장군까지 국왕 측근의 엘리트 코스 봉직
최충헌 정권서 초월 정치보다 야전돌며 군대 통솔 매진
3차례의 거란군 침입 패퇴시킨 명장앞에 몽고군도 주눅
15년간 잠정적 평화 구축 대몽항쟁 기반 다질 시간 벌어

#야전사령관 흔적 곳곳에 남아
그런 상황에서 위열공 김취려 장군은 특별한 존재였다. 고려의 군사적 기반이 취약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고려를 범한 몽고군에게 고려 왕실은 안중에도 없었다. 무신정권으로 권력이 유지되는 고려에서 왕실의 존재는 그야말로 허수아비였기에 금을 치고 거란을 유린한 몽고는 그저 말발굽 소리만 요란하게 울려도 고려가 백기투항을 하리라 생각했다. 그런 몽고에게 고려의 국권과 한민족의 기개를 바로 세운 장수가 바로 위열공이었다.
 위열공 김취려 장군은 전통적인 무반가문에서 태어나 15세 때 부음(父蔭:아버지의 관직을 인정받아 자식이 음서의 혜택을 받는 제도)을 받아 관리가 됐으며, 이후 강동성 전투에서는 원수인 조충 못지않은 공로를 세워 최충헌의 핵심인물로 부각됐다. 김취려의 생애 가운데 부음을 받아 입신한 이후 젊은 시절의 기록이 그리 많지 않은 이유는 김취려의 특별한 처세술과 국가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취려 이후의 언양 김씨 문중은 고려 무신정권시대 김취려 장군으로부터 5대에 걸쳐 수상 내지 재상에 오른 사람이 수두룩했고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명문가로 자리했지만 김취려 장군이 중앙무대로 진출할 시기에는 그렇지 못했다.

 기록에 의하면 김취려 장군은 태자부 견룡이라는 첫 보직부터 대장군이라는 고위직에 오를 때까지 거의 국왕 측근의 친위군 소속으로 복무하였다고 한다. 철저하게 무반의 엘리트 코스만을 따라 승진해갔던 것이다. 그 근거로 김취려 장군이 대장군의 직위에 오르기까지 어견룡행수(御牽龍行首), 지유(指諭), 중랑장(中郞將), 장군(將軍) 등을 거쳤다는 기록이 있다. 문제는 여기서 김취려 장군이 최충헌의 무신 정권 아래 중앙정치 무대에서 별다른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곧 김취려 장군이 정치보다는 장군으로서 야전에서 군대를 통솔하는 일에 매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에 대한 기록은 여러 가지 자료로 남아 있다. 조충과 함께 거란을 물리친 기록이나 고려사 곳곳에 등장하는 야전사령관으로서의 김취려 장군 이야기가 그렇다. 이들 자료를 전반적으로 살펴보면 김취려 장군이 야전생활을 통해 전장에서 뛰어난 전략을 구사했다는 사실과 그로인해 북방의 침략세력에게 고려의 취약한 군사력보다 김취려 장군이라는 무장의 존재가 부각돼 있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1200년대초부터 고려 국경 유린
몽고의 침략이 본격화 된 것은 1206년 칭기즈칸이 몽고족을 통일하고 칼끝을 금에 겨누고 부터다. 요나라가 멸망한 뒤 금에 복종하고 있던 거란족은 이 틈을 타 대요수국(大遼收國)이라는 국호를 걸고 독립했다. 그러나 몽고의 칼이 거란족이라고 비껴가지 않았다. 몽고는 요나라 유민들이 세운 대요수국이 자신의 통제권을 벗어나기 시작하자 사정없이 거란을 두들겼다. 견디다 못한 거란인들이 1217년 압록강을 넘어 고려 북방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거란을 제압한다는 명분으로 고려의 국경을 넘은 몽고군 앞에 고려는 철저히 무너질 수밖에 없는 형국이었다. 김취려 장군은 이 때 후군병마사로 참전해 제천 박달재 전투에서 10만명에 이르렀다는 거란군을 물리쳤다. 고려사에 따르면 김취려 장군이 거란군을 쫓아 강동성까지 진군한 몽고 장군 합진찰라(哈眞札剌)와 대면했고, 강동성의 거란군에게 승리를 거둔 뒤 몽고와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고 한다. 거란을 마음껏 두드리고 세계의 패자로 화려하게 등극한 몽고와, 3차례에 걸쳐 침입한 거란을 끝내 패퇴시킨 고려가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한 것이다.

김취려 장군 후손들이 언양 장군의 묘소에서 추모제를 올리고 있다.

# 몽고군도 물러서게한 장군의 기개
여기서 주목할 점은 몽고가 고려를 침략한 이후 곧장 개경을 유린할 수 있었는데도 왜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선에서 침략전쟁의 쉼표를 찍었느냐는 점이다. 이에 대해 많은 전문가들은 김취려 장군을 주목한다. 강동성 전투나 박달재 전투 등에서 보여준 김취려 장군의 기개는 하늘을 찔렀고, 하룻강아지쯤으로 여기던 고려가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몽고군은 놓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자칫 적의 심장 깊숙이 들어와 김취려 장군의 창칼에 도륙을 당하는 것보다 외교관계로 일단 물러나 정황을 살피는 것이 전략적으로 옳은 방법이라는 사실을 몽고군 수뇌부가 파악했다는 뜻이다.
 결국 강력한 군사력은 없었지만 왕실에 대한 충성과 민족에 대한 애정으로 무장한 김취려 장군의 야전사령관 시절의 무공이 몽고군으로 하여금 정면승부를 피하고 화친의 길로 유도하는 계기가 된 셈이다. 물론 불과 15년 남짓한 잠정적 평화였으나 그런 외교적 절충은 고려사직에 중대한 사안이었다. 몽고의 사정에 어두운 무신정권과 동북아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고려정권이 시간을 벌 수 있는 기회가 됐고 외교로 유지된 평화기간을 통해 고려의 대몽항쟁 기반이 만들어진 셈이다. 바로 그 외교의 중심에 위열공 김취려 장군이 있었고, 그의 활약이 누란의 위기에서 고려를 살렸기에 구구의 영웅이라는 수식이 아깝지 않다는 이야기다.  김진영 편집국장 ced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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