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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은 나이에 더딘 황소걸음으로 마침내 '문학의 숲길'에 들어섰다는 성덕희 시인. 그에게 책과 서재는 힘들고 어려운 순간마다 밝은 등불이 되준 기특한 곳이다.

달 항아리 같은 사람. 성덕희 시인을 만나고 온 날 그가 내게 남긴 인상이 그랬다. 흔히들 도자기가 사람을 닮았다고 비유하지만 가끔은 사람을 보고 도자기가 떠오르는 경우도 있는 법인가보다. 그의 집에서 순백의 달 항아리를 마주한 기억 때문인지 그와 달항아리는 닮은게 많아보였다. 시간이 갈퀴고간 세파의 흔적이 무색하게 매끄러운 백자 표면처럼 맑았던 그의 마음이 그랬고 어머니 같이 너른 품, 따뜻한 인정도 달 항아리가 품어내는 모습 그대로 였다. 아마 그를 아는 이들이라면 이 비유에 누구나 고개를 주억거리지 않을지.

# 문인들의 사랑방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던 말복, 울산 남구에 있는 성덕희 시인의 서재를 찾았다.
 특별할 게 없는 창고 같은 곳이라고 연신 쑥스러워 했던 시인의 서재는 일반 가정집에 소박하게 마련된 곳이지만 그를 아는 많은 문인들에게는 더없이 따뜻하고 편한 공간으로 정평이 난 곳이다. 이날 함께한 한신디아 시인에 따르면 여러 문인들이 이곳에서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거나 문학행사를 갖는데 한번 오면 끊임없이 음식이 나올 정도로 후한 대접을 받고 가서 누구라도 한번 오고나면 잊지 못하는 곳이라고 했다.
 성 시인은 이것이 어릴때부터 지나가는 동네 거지도 그냥 못보내던 자신의 어머니에게서 배운 습관인거 같다고 했는데 요즘 젊은 세대에선 보기 힘든 이런 모습을 보고있으니 참 배울게 많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아내의 삶 충실하다 예순에 시인 등단
삶의 경험·혜안 고스란히 작품에 녹아
독서 풍성한 삶 원동력이자 지식 보고

# 늘 책과 함께 했던 유년시절
성덕희 시인의 서재는 책을 읽고 집필을 하는 공간과 음악과 차를 즐길 수 있는 다실로 구분되는데 서재에는 문학부터 일반 교양서, 과학전문서 까지 다양한 책이 많고 다실에는 문학과 관련된 책들이 주로 많다. 울산 문학가들의 시집과 소설이 눈에 띄고 그동안 애독해온 책이 많이 눈에 띄었다.

 다실에서 차를 한잔씩 하며 성 시인은 자신의 문학인생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그가 처음 책과 글을 가까이 하게 된 데는 그의 외할머니 역할이 컸단다. 그가 어릴 적만해도 동네에는 배운이들이 별로 없어 제사 때 쓰이는 제문이나 축문을 쓸 일이 생기면 많은 이들이 그의 집을 찾아왔다고 한다. 그럴 때면 외할머니는 부엌에서 밥을 짓고 있다가도 잠시 나와 그런 글을 써주고는 또 부엌에 다시 들어가 일을 하곤 했다고 했다. 그 덕분에 성 시인은 어릴 때부터 책과 글을 가까이하며 살게 됐고 그가 학교에서 글짓기 상 등을 타오기라도 하면 주변 어른들은 "니가 네 외할머니를 똑닮았구나"라는 얘기들을 했단다.

 오빠와 언니의 틈바구니에서 다양한 책을 읽던 시절도 있었다. 연애소설일 때도 있었고 위인전도 있었다. 어떤 때는 흔치 않은 과학책을 읽기도 했다. 그러나 제목을 콕 집어 기억하는 책은 그리 많지 않다. 그렇다고 그 책들이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한번 읽은 책은 마음에 남아 어떤 모양으로든 그 사람의 삶에 궤적을 남기게 마련이다. 그 역시 책을 읽은 경험이 살다가 문득문득 나올때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문학 소녀시절, 접했던 헤세 소설 속에서 '운명은 언젠가는 당신이 꿈꾸는 대로 이뤄질 것이다. 그 꿈이 당신의 운명이라면 그 꿈에 충실하라'는 에바부인의 말처럼 그는 '문학의 길'을 선택했다. 그렇게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국어교사 생활을 잠시 하게 됐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서 아내이자 어머니의 삶에 집중하며 살아야만 했다. 신사임당의 현신이 바로 저렇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모습은 현명한 아내이자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실제 그의 자녀는 카이스트를 졸업한 수재이기도 하다. 자식을 훌륭히 키워낸 그 스스로는 "자식을 잘 키우면 내 자식이 아니라 세상의 자식이 된다"고 아쉬워하는 눈치였지만 "그래도 자식은 잘 키워야하는 존재"라고 말하는 걸 보니 남다른 사랑과 가정교육을 시켰을 법했다.

# 평생 간직한 문학 열정
물론 그런 그도 사실은 자유스러워지고 싶었던 적이 있었단다. 얼마전 울산문학 2012 여름호에 실린 수필 '청개구리 울음'에서 그는 그런 얘기들을 털어놓았다. 그렇게 자신은 잊은 채 자녀들을 키우는데만 몰두하는 세월이 지나고 그때서야 자신의 삶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던 그는, 나이 예순이라는 느지막한 나이에 울산에서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시인으로 등단했다. 남부도서관에서 문학강의를 다시 들으며 최일성 시인의 추천으로 드디어 용기를 내게 된 것이다. 남편의 지원과 도움도 큰 힘이 됐다.

 늦은 작품활동이 힘들지는 않았냐는 질문에 그는 "바쁘게 사는 동안에도 문학에 대한 애정과 끈은 가슴깊이 간직하며 살았던 것 같다"며 "또 삶을 살면서 얻은 경험이나 혜안이 작품을 쓰게 하는 좋은 재료가 됐다"고 했다. 그의 서재에 가면 수많은 시집과 소설 등의 문학서적 외에도 오랫동안 그가 해온 차(茶)와 시에 대한 스크랩자료가 있는데 며느리라도 줄 생각에 열심히 모았다는 이것 역시 그 동안 문학에 대한 그의 꾸준한 관심의 방증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책은 간접경험을 함으로써 삶을 풍성하게 할 뿐 아니라 작가로서 정확해야 할 팩트전달을 위해 늘 봐야할 것이기도 하다. 그는 특히 작은 정보나 교양지식을 쌓는데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는 그와 대화하는 내내 쏟아내는 방대한 지식에서도 알수 있었다.

 "오랜 기다림에 저절로 솟구치는 눈물 같은 詩를 빚고 싶다"는 어느 시인처럼 열정을 다해 감동을 주는 기품있는 시를 쓰고 싶다는 성 시인. 그의 바람이 이뤄지는 동안 그의 서재 역시 늘 그 곁에서 함께할 것이다. 함께한 유쾌한 몇 시간이 흐르고 집을 나서는데, 발에 난 상처에도 온화한 미소로 문밖까지 마중하는 성 시인은 달항아리와 더 닮아있는 모습이었다.

[성덕희 시인이 꼽은 내 인생의 책]

알을 깨고 나오는 새처럼 파멸은 새로운 탄생을 예고

# 데미안(헤르만 헤세)
주인공 싱클레어가 친구인 데미안의 영향으로 정신적으로 성숙되고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청춘소설이다.

 싱클레어는 빛과 어둠, 선과 악. 상반되는 두 세계에서 악의 유혹으로 갈등하다가 데미안을 만나 자아를 의식하게 된다. 베아트리체라는 소녀를 통해 성의 욕망과 순결에 눈을 뜨고, 음악가 피스토리우스에게서 배화교 종교 의식과 아프락싸스(선과 악 모두를 가진 신)을 알게 된다.

 '새는 알을 까고 나온다 / 알은 세계다 /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싸스다.'라는 소설 속 시구처럼 알을 깨고 나오는 새처럼 파멸은 새로운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며 죽음 없이는 새로운 것이 오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된다.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부인을 만나 사랑의 체험을 하게 된 싱클레어는 전쟁 중 숨을 거두면서 검은 거울위의 자신의 모습에서 친구이며 안내자였던 데미안을 본다. 데미안은 자신의 분신이며 무의식 속, 내면에 숨겨진 자아였던 것이다.

 이처럼 새로운 정신세계를 그려낸 헤세의 <데미안>은 사춘기 시절 성장통을 앓던 나로 하여금 공감을 느끼게 했고 많은 감명도 받게 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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