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세기의 대결인 런던올림픽 한일전에서 완패를 당한 일본이 화끈한 분풀이 대상을 찾았다. 야스쿠니 신사에 절을 올린 우익세력들은 주일 한국대사관으로 몰려갔다. '조센진 물러가라'를 외치고 '이명박 대통령은 예의를 갖추라'고 악을 쓴다. 며칠 전 벽돌을 던지는 사건도 있었다. 우리의 광복절인 8월 15일, 그들은 패전일이다. 그들의 왕이 항복을 선언한 굴욕의 날,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의 완장을 찬 A급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는 일본 우익의 마쯔이 축제장이 된 듯했다. 과거를 부르는 군국주의 깃발이 나부끼고 '애국당' '황애(皇愛) 특공' 등의 휘호가 새겨진 차량들이 확성기로 군가를 틀어댔다. 물론 욱일승천기와 일장기는 기본이다. "천황 폐하 만세"가 야스쿠니를 진동할 무렵, '대일본제국 해군' 마크가 선명한 노쇠한 전역병들이 나팔을 불었다. 거의 광란 수준이다.

 화려한 과거는 향수를 부른다. 초등학교 때 반장 안 해본 사람이 없고 옛날 자기네 집 금고엔 황금 돼지 몇 마리쯤 없던 집이 없다. 조상 중에 정승을 지냈거나 왜놈이나 오랑캐 수십쯤은 단칼에 베어버린 위풍당당한 선조의 무공을 전설처럼 간직한 우리네의 과장법은 술잔 뒷담화로 지금도 오르내린다. 과거가 그리운 시점은 현재의 불만이 잔을 채울 무렵이다. 허전하면 과거가 생각나는 법이다. 이사부 장군이 창검을 꽂고 눈을 부라리던 오랜된 과거, 동해 바다엔 왜구가 득실거렸다. 국가도 민족도 별 의미 없던 시절, 먹고살기 위해 노략질을 일상으로 삼던 무리들이 우리 땅을 제집 마당처럼 들락거렸다. 질서를 잡고 절차를 밟으라고 금을 긋고 예를 가르친 시간, 왜놈은 밝은 날엔 머리를 조아리다 어두워지면 관가의 창고를 털고 민가를 덮쳤다. 그 숱한 반복의 역사 속에 그들이 배운 건 훔친 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 오래 간직하는 법이었고 그 학습이 19세기 제국주의를 만들었다.

 그래도 뿌리는 한줄기다. 소서노 할머니가 주몽과 결별하고 새로 찾은 땅, 아리수 터전에 깃발을 꽂고 백제를 세웠을 때, 한 무리의 피붙이들이 섬나라를 개척했다. 태양신을 받들고 삼족오 문양을 가슴에 품은 것이 일본의 오래고 먼 과거다. 하지만 지금의 일본은 소서노 할머니로 시작한 자신의 과거가 영 개운치 않은 모양이다. 그래서 그들은 왜곡을 택했다. 초등학교 아이들은 상고시대부터 일본 열도가 중원대륙과 직접 교류했다고 주문처럼 가르친다. 야마가와 출판사의 일본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인 '상설 일본사 B'에는 '일본 문화의 여명'이 나온다. 상단에 1만년 전에서 2만년 전의 갱신세(更新世) 말기의 아시아 빙하기 지도를 실었다. 중국 동쪽 바다가 빙판이고, 일본 규수 서쪽의 오도열도(五島列島)를 중국 쪽으로 쭉 뻗게 하여 애써 일본과 중국이 인접한 듯이 보이게 한 지도이다. 본문은 친절하다. "한랭한 빙하시대가 여러 차례 있었고, 해면이 현재에 비해 100미터 이상이나 하강했다. 이 때문에 일본 열도는 북과 남에서 아시아 대륙과 육지로 이어졌고, 북쪽에서는 맘모스 등, 남쪽에서는 코끼리나 사슴 등이 왔다. 이들 대형 짐승을 따라 인류도 몇 차례 물결처럼 일본 열도로 건너온 것 같다"는 내용이다. 장황하게 대륙과의 연결성을 이야기 한 이 교과서의 의도는 일본이 아주 오랜 옛날부터 대륙 문물을 받았다는 주장을 하기 위한 수사에 불과하다.

 인정하면 편한데 부정하려고 드니까 불편해진다. 거짓을 정당화하기 위해 숱한 거짓을 반복해야 하듯 일본의 역사학계는 거짓의 논리화에 달인들이 모였다. 빙하시대부터 대륙과 직접 교류한 민족이 일본인이니, 소서노 할머니와 야요이시대의 대량 인구 유입은 지워버리고 싶다. 지워 없애고 새로운 근거를 집어넣은 것이 임나일본부를 비롯한 날조된 역사다. 그래서 그들은 작은 소리로 이야기한다. 소곤거리듯 눈웃음치며 일본인의 조상은 대륙에서 왔고 선진 문물을 역으로 한반도에 전파했다고 말이다. 소가 웃을 일이지만 흥분할 일은 아니다. 아무도 일본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으니 그냥 떠들도록 두면 된다. 이미 세계적인 역사학 권위자나 학계에서는 일본인의 뿌리를 한국인으로 분류하고 있다.
 문제는 여전히 일본의 지도자들이 한세기 전 욱일승천기를 들고 목젖을 세우던 제국주의시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동해바다에서 러시아 전함을 침몰시키던 오래된 추억은 화려하다. 그 화려한 전설의 중심이 독도이다 보니, 독도는 언제나 자신들의 것이고 싶은지 모른다. 일본이 한반도를 무지에서 깨운다는 '일한동조론'에 기초한 한일관계사가 지배하는 뇌구조로는 일본의 우익들에게 일왕의 사죄는 불쾌할 수밖에 없다. 인정하면 쉬운데 무릎을 꿇어도 가슴 밑바닥에서 반성의 눈물이 쏟아지지 않으니 답답할 수도 있다. 원래 남의 것을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유전인자가 수천년 지속된 탓이니 어쩌랴. 그것이 바로 불편한 이웃을 가진 우리의 운명이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