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원도 인제(麟蹄) 땅 가는 길은 참 멀고도 험했다. 오죽하면 군인들 사이에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라는 넋두리가 생겨났을까. 인제의  북쪽은 휴전선으로 막혀 있고, 다른 쪽은 모두 험한 산을 두르고 있다. 설악산을 비롯해 향로봉, 응봉산, 점봉산, 대암산, 방태산, 소뿔산, 주억봉, 구룡덕봉, 가칠봉, 한석산, 매봉, 안산, 가리봉, 가마봉 등 해발 1,000m가 넘는 산이 즐비하다.
 

 하지만 세상은 달라졌다. 인제를 가르는 국도는 왕복 4차선 도로로 확 넓어졌다. 군축령, 미시령, 조침령, 광치령 등 험한 고갯길은 대부분 터널이 뚫렸다. 산촌 오지까지 아스팔트 길로 연결됐다.
 그렇다고 한반도의 남쪽 울산에서 인제 가는 길이 쉬운 것이 아니다. 경부고속도로와 중앙고속도로를 거쳐 강원도 홍천까지 꼬박 5시 간을 달린 후 국도를 따라 1시간을 더가야 하는 거리다. 그래서 하루 여행지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1박2일 또는 2박3일, 넉넉하게 주말을 투자해야 인제 여행의 참맛을 즐길 수 있다. 
 

 인제의 소양호는 겨울철 100만 명 넘게 다녀가는 국내 최고의 빙어낚시터다. 용대리 덕장에서 겨울바람에 말리는 황태는 국내 생산량의 70%를 차지한다. 설악산의 70%를 차지한 인제군 내설악 지역은 강원도의 대표적인 명소다. 주봉인 대청봉을 비롯해 백담사, 봉정암, 오세암, 백담계곡, 가야동계곡, 용아장성, 대승폭포 등 내설악 명소들이 등산객과 불교 참배객을 불러 모은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내린천은 국내 래프팅의 원류라고 할 수 있다. '천상의 화원'으로 불리는 야생화 천국 곰배령, 눈꽃이 화려한 진동2리 설피밭은 트래킹 명소로 인기가 높다.  어떤 코스를 선택하든 도시의 삶 속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풀고, 심신의 평화를 얻기에 충분하다.
 여름의 끝자락에 다녀 온  '하늘 내린'인제 여행지는 만해 한용운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간 내린천 상류 북면 용대리 만해마을과 백담사다. 

   
만해마을 입구에는 지난 2000년 세계시인대회 후 동판에 새긴 세계 150여 시인들의 작품이 걸려있다.

 

# 건축가협회상을 수상한 만해마을

만해마을은 지난 2003년 백담사 부담과 정부보조를 받은 '만해사상실천연구회'가 건립했다. 만해마을은 한국문학사의 대표적 시인이자 불교의 대선사, 민족운동가인 만해 한용운 선생의 문학성과 자유사상, 진보사상, 민족사상을 높이 기리기 위한 실천의 장소다. 
 국도(31호선)를 따라 백담사로 가다보면 강원도 산속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 회색 콘크리트 건물들이 보이는데, 그 곳이 만해마을이다. 내린천 옆 오래된 소나무 군락에 살포시 묻혀있는 만해마을은 고즈넉한 공간에 격동적인 시간을 담고 있다. 민족과 나라를 위해 외치던 만해의 사상이 시대를 넘어 이곳에 자리한 것이다. 
 
   
백담사 경내에 세워진 만해 선생의 흉상과 '나룻배와 행인' 시비.

 만해마을은 수만평 부지에 부대시설로는 콘크리트 축조 출입문인 '경절문'(사찰의 '일주문' 성격임), 만해 박물관, 문인의 집, 만해사 법당, 학생 수련원 등이 있다. '경절문' 콘크리트 양쪽 벽면에는 2000년대 세계시인대회를 치른 후 세계시인 150여명의 자국어 친필 시 150여 편이 동판에 양각으로 새겨 천년 만년 보존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만해 마을의 모든 건물이 콘크리트 벙커식 회색으로 되어 있는 것은 불교적 의미가 있는 듯하다. 건축가는 어려운 시절을 비켜가지 않고 올곧게 살려했던 만해선생의 자유와 평화에 대한 의지를 회색으로 표현했을 것이다.
 

 중앙 수로를 중심으로 배치된 건축물들은 동떨어진 듯 하면서도 연결되어 있다. 건축물이라는 거대한 조각들이 들어섰지만, 그 사이 공간을 사람들이 메우면서 다함께 하나가 되는 느낌이다. 어느 건축평론가는 '서로 무심한 듯 따로 또 같이 서 있는 건물은 적절히 안배된 내·외부 공간의 교류를 품고 있어 적절한 긴장을 일으킨다'고 했다. 그 말이 실감난다. 만해마을은 건축가의 이런 시도를 인정받아 지난 2004년 건축가협회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 한용운의 작품을 한 곳에 모아놓은 '만해문학박물관'
만해마을의 볼거리는 만해선생의 문학작품을 모은 만해문학박물관이다. 지난 2003년 개관한 만해 문학 박물관은 260여 점의 도서와 동상, 영인본 등 600여 점이 전시 중이다. 1층 상설전시실은 한용운 선생의 연대기와 '풍상세월 유수인생(風箱歲月 流水人生)' 친필이 걸려 있다. 또 <님의 침묵> 초간본, <조선불교유신론>, <십현담 주해> 등 저서와 수형기록부, 친필 편액 등도 볼 수 있다. 2층 기획전시실에서는 서예, 서화, 미술 등 문예작품의 기획전과 초대전이 펼쳐지며, 3층 세미나실은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들의 시집을 비치해 놓고 있다.
 

 박물관 내부 벽도 모두 회색 콘크리트 그대로다. 화려한 대리석 마감을 하지 않았는데도 전시물과 어울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1층 전시실에 들어서면 동쪽 벽면을 통해 박물관 안으로 들어오려는 만해선생의 동상을 만날 수 있다.
 <님의 침묵> <알 수 없어요>를 지은 만해 한용운 선생은 우리의 얼과 말, 글을 바로세운 민족의 위대한 스승이다. 수없이 많은 지식인들이 친일의 오명을 쓴 것과 달리 만해선생은 민족의 자존심을 지킨 위대한 사상가요 불교운동가였다. 
 

   
만해문학박물관 바깥에 세워진 만해의 동상. 벽에 갇힌 자신의 흔적 속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이채롭다.

 만해선생의 일화 중의 한 대목이다. 만해 선생이 독립선언문에 서명을 받기 위해 민족지도자 한 사람을 찾아갔다. 하지만 그는 당시 여러 사정으로 인해 서명을 꺼렸다. 그러자 만해선생은 칼을 빼들고 "죽어야 겠다"고 했다. 독립선언문에 서명하지 않겠다는 것은 밀고자가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만해선생의 뜻에 따라 33인중의 한명이 되었다. 또 다른 민족지도자 한 사람이 서거하자  그의 장례를 위해 대규모 장의위원회가 구성됐다. 그의 명성에 맞게 많은 민족지도자들이 참여했다. 당연히 위원회에서 만해선생의 이름을 장의위원 명단에 올랐다. 하지만 이를 안 만해선생은 명단의 적힌 자기 이름을 철필로 긁어 버렸다. 얼마나 힘껏 긁었는지 종이가 찢어지고 펜이 부러졌다. 이를 지켜보던 이들이 의아해하자 만해선생은 "이 자는 독립선언문에 서명하자고 했을 때 거부했다. 그런 자의 장의 명단에 왜 이름을 넣었느냐"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일화에 가감이 있겠지만 온몸으로 독립운동을 한 선생의 면목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은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26세인 1905년 인제 백담사로 출가하여 1944년 열반했다. <님의 침묵> 등 그의 작품은 대부분 인제 백담사에서 탄생했다. 백담사는 1988~1991년 전두환 전 대통령 내외가 3년여 머문 후 관광객들의 발 길이 이어지면서 유명세를 탔다. 강원도와 인제군은 백담사의 유명세를 바탕으로 '만해'콘텐츠를 활용한 문화 관광자원화 사업을 진행했다. 만해마을을 중심으로 '만해축전'을 매해 8월에 열고 있다. 만해마을에서는 각종 문학관련 행사가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뒤늦게 만해선생의 출생지인 충남 홍성군에서 '만해를 돌려 달라(?)'고 법정싸움을 벌였지만 허사였다. '만해'의 정신과 문학은 하늘이 내린 청정농산물, 내린천과 함께 '하늘 내린' 인제의 경쟁력이 됐다.
 

# '님의 침묵'이 탄생한 백담사, 만해 흔적 고스란히 간직
백담사는 만해마을에서 승용차로 10분 남짓 가면 나오는 '백담휴게소'에서 셔틀버스를 이용하면 누구나 갈 수 있다. 찾는 이가 많지 않았던 이 절은 전직 대통령이 세상을 피해 머물면서 명소가 되어 버렸다. 그런 탓인지 사람들은 이곳이 만해 선생의 사상과 문학의 산실로 기억하기 보다는 우리나라 현대사의 아픈 생채기의 현장으로 여긴다. 백담휴게소에서 셔틀버스를 타지 않고 넉넉잡아 두 시간 정도 백담사까지 산행을 하는 이들이 많다. 굽이굽이 이어지는  산길을 따라가는 산행으로 백담사를 찾는다면 한적하고 여유롭게 옛 느낌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백담사는 설악산의 최고봉인 대청봉에서 시작되는 물길을 따라 100번의 웅덩이를 지나면 나타나는 자리에 지어졌다는 유례를 가지고 있다. 이곳에서 만해 선생의 '님의 침묵'이 만들어졌고, 불교유신론을 제창하여 근본을 잃어가던 우리 불교를 민족불교로 발전시킨 만해의 사상이 시작되었다. 경내 한편으로 자리 잡은 화엄당에는 만해 선생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리고 전 대통령이 머물렀던 공간도 그대로 남아있다. 만해선생과 전 대통령의 흔적이 백담사를 찾는 이들에게 어떤 깨달음을 던지는지 궁금하다.
 백담사의 늦여름은 내설악의 푸른 기운으로 아름답다. 뒤편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를 따라가면 다섯 살 동자 스님의 깨달음이 전해지는 오세암과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의 하나인 봉정암이 백담사의 부속사찰로 자리잡고 있다.
 

   
백담사에는 만해선생 기념관과 전두환 전 대통령이 은둔하던 거처가 보존되어 있다.

 백담사 앞으로는 절터만큼이나 넒은 계곡이 흐른다. 가파르게 달리던 물길이 백담사 앞에서 쉬어가는 형국이다. 계곡은 잔돌들로 가득 메워져있고 콸 콸 흘러내려야 할 물길은 넓지 않다. 응당 흘러내려야 할 물은 없고 누군가 쌓아놓은 돌무더기들이 지천이다. 누군가 시작한 돌탑 쌓기는 이제 백담사 계곡의 명물이 되었다. 폭우가 쏟아지면 다 물거품처럼 스러져갈 소망탑들이지만 정성껏 쌓아올리는 사람들 마음속엔 기원이 끊이지 않는다.
 

 만해선생은 서울에서 첩첩산중 백담사까지 걸어서 왔을 것이다. 만해선생이 '단풍나무 숲'을 헤치며 그 먼 길을 오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빼앗긴 조국은 또…. 어쩌면 만해선생은 백담계곡의 화사한 화강암을 보며 '회사후소(繪事後素·그림은 먼저 바탕을 손질한 후에 채색한다)'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마음속의 '아쉬움'을 지워내고, 문학을 통해 '희망'을 창조하지 않았을까. 글·사진=강정원기자 mikang@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