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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통일신라의 폭정을 거부하고 탄생한 왕조다. 왕조의 성립 과정에서 주요 거점의 호족 세력과 연합할 수밖에 없었던 왕건은 불교를 호국정신으로 삼고 문신을 우대했다. 칼로 잡은 정권의 뒷덜미는 언제나 불안하기 마련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왕건이 선택한 것은 문신의 우대와 문치 중심의 국정이었다. 왕건은 전란에 지친 백성을 다독이고 쉬게 하는 정치를 펼쳤다.
 그 중심이 문신의 우대였고 불교의 성역화였다. 결국 이같은 왕건의 치세는 후대의 무신정권을 촉발하는 빌미가 됐다. 더구나 왕건의 문신 우대정책은 자연스럽게 국방에 대한 관심을 떨어뜨렸고 국경의 불안을 촉발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고려태조 왕건의 문신우대 정책이
후대 무신정권을 촉발하는 계기로

왕실과 대척관계의 무신들에게서
스스로 거리를 두고 변방을 지킨
장군의 처세가 결과적으로 고려를 구해
 
# 혁혁한 무공으로 종1품 시중까지 올라
실제로 고려의 건국 시점은 동북아 정세의 격동기였다. 광활한 내몽고지역에서 기마군단이 부족 통일의 기운을 모을 무렵이었고 고려와 국경을 함께 한 거란은 수시로 고려를 넘나들며 약탈을 자행했다. 이같은 시대적 배경은 김취려 장군에게 특별한 의미가 됐다.
 김취려(金就礪 1172~1234) 장군에 대한 기록은 거의 대부분 고려를 침입한 거란족을 몰아낸 명장으로 서술된다. 거란의 십만 대군을 무찌른 기개가 누란의 위기였던 고려를 구해냈다는 식의 무공 서술식이다. 하지만 우리는 김취려 장군의 생애와 그의 국가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취려 장군의 본관은 언양이다. 언양 김 씨의 시조로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과 고려 태조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 사이에 일곱 번째 아들로 태어난 김선(金繕)의 직계로 가문의 후광을 받았다. 부친인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낸 김부(金富)의 음보(蔭補)로 정위(正尉)가 되어 동궁시위(東宮侍衛)에 뽑혔고 무공을 인정받아 장군이 되고 동북계를 지킬 때 대장군으로 발탁되었다. 1221년 거란족을 물리친 공으로 추밀원사 병부상서 판삼사사가 됐으며 참지정사 판호부사를 거쳐 1228년에는 수태위 중서시랑평장사 판병부사가 됐다. 그 뒤 당시 최고 정무기관인 중서문하성의 수상직으로 종1품에 해당하는 시중(侍中)에 올랐다.
 여기에 서술된 김취려 장군의 생애에서 주목할 사실은 유난히 그가 변방의 지휘관으로 활약한 일이 많았다는 점이다. 동북계의 지휘관으로 활약할 시기에 김취려 장군에게는 큰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바로 국경 너머에서 벌어지는 온갖 세력의 이합집산 과정이 그랬다.  
 사막의 초원지대를 주름잡던 몽고의 부족들이 통일의 깃발을 들고 천하를 호령하면서 동북아의 질서는 급격히 변했다. 바로 그 시기에 국경을 지킨 김취려 장군은 고려가 맞이할 숙명적 전쟁을 직감했다. 국방보다는 개인의 호사에 관심이 많았던 무신정권과 늘 일정한 거리를 두었던 김취려 장군의 처세도 변방에서 깨달은 국제정세와 무관하지 않았다.
 
#절검·정직한 성품에 부하 먼저 아끼는 배려
김취려 장군의 풍모는 신장이 6척5촌, 수염이 배 아래까지 내려와 조복을 입을 때는 수염을 나누어 들게하고 속대를 하였다 한다. 또 그의 사람됨이 절검 정직하여 충의로 자수(自守)하고 군기를 엄하게 가지니 사졸들이 감히 범하지 못하였다고 전해진다.
 변방의 무장으로 다진 그의 실전 감각은 무엇보다 병사와 지휘관이 신의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가치관을 만들었다. 튼튼한 국가는 지킬 수 있는 힘을 바탕으로 해야 하듯, 강력한 군대는 병사와 지휘관의 끈끈한 믿음으로 유지된다는 사실을 장군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한잔 술이 생겨도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사병들부터 챙긴 장군의 행동은 부하들에게 존경심으로 다가왔고 존경과 신뢰가 바탕이 된 그의 군대는 십만대군의 위세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전진할 수 있었다. 무장이지만 학문에 밝았던 장군은 적을 공격할 때는 힘으로만 맞서지 않았다. 전략과 전술을 치밀하게 세우고 적의 약점을 공략했다. 하지만 전투에 나서 무공을 세워도 장군은 그 공을 스스로 자랑하지 않았다.             
 한 예로 고종 3년(1216)에 거란왕자 금산(金山)이 몽고에게 쫓겨 국경을 넘어왔을 때 15만거란군과 상대한 전투다. 겨우 1만3천 병사로 맞선 이 전쟁에서 거란은 철원, 원주 등을 짓밟고 개경을 위협했지만 황궁이 있던 개경을 지켜냈다. 특히 전군병마사로 참여한 박달재 전투는 거란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고 이후 고려의 대몽 외교에 지렛대 역할을 했다. 무엇보다 장군을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전공은 강동성(江東城) 전투다.
 패색이 짙은 이 전투에서 장군은 스스로 나서 몽고 원수와 독대했다. 명장은 명장을 알아보는 법, 몽고 원수 합진은 흔쾌히 장군과 강화를 맺고 국경 밖으로 물러났다. 몽고가 승기를 잡은 전투에서 물러난 것은 역시 김취려 장군의 무수한 전공과 인품이 배경이 됐다. 몽고 원수가 장군을 형으로 불렀다는 기록이 이를 증명한다.
 
#권력의 중심에서 거리둔 처세가 나라를 국난에서 건져
무신정권기에 권력의 중심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었던 장군의 처세는 아이러니 하게도 결국 고려를 국난에서 구하는 결정적 인물을 낳았다. 사료에는 나오지 않지만 당시 무신정권의 중심에 있던 최충헌은 바로 이같은 장군의 위상 때문에 언제나 그를 견제해 온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무신 세력들의 입장에서 보면 장군은 언제나 황실의 측근이었다. 황실과 대척관계에 있던 무신정권에서 무장의 꼭짓점에 있던 장군을 변방으로 돌게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제는 김취려 장군 스스로가 이같은 고려의 정치공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애국충정에 있어서는 어느 누구와도 타협을 하지 않았던 장군이기에 스스로 정치의 중심에 선 순간, 국경을 넘보는 오랑캐들과 맞서 싸우는 기회마저 박탈될 것을 잘 알기에 그는 스스로 변방의 호랑이로 남았다. 후세의 사가들은 이같은 김취려 장군의 생애를 두고 왜란의 중심에서 사직을 구한 이순신 장군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근거를 삼고 있기도 하다. 바로 그가 울산 출신 위열공 김취려 장군이다.
김진영 편집국장 ced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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